그녀를 믿지 마세요
고등학교 시절 명주와 세진은 성격이 달라 서로 잘 어울렸다. 너무 달랐다.
명주는 학교 친구들을 모두 알고 지낼 만큼 유명했고, 세진은 수줍음이 많았다.
늘 조용하게 야간 자율학습하고 있던 세진을 명주가 불러내서 떡볶이도 먹고, 학교 앞 노래방이나 만화방도 같이 다녔다.
명주와 세진은 성적이 늘 좋았던 터라 학교 선생님들도 그냥 묵인해 주는 일탈이었다. 반항적인 불량한 행동이라기보다 스트레스가 유난히 많은 때가 있다고 이해하게 되는 학생 쪽이었다.
2학년을 마무리할 무렵 학생회에서는 학교 문예지를 맡아줄 학생으로 세진이 당연하게 거론되었고, 그때 명주가 편집부를 도와서 함께 하겠다고 나섰다.
세진은 마지막 교정을 위해 일요일 오후 학교 편집실 문을 열었을 때 누군가 먼저 와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미 명주가 의자에 앉아 편집본을 맞춰보고 있었다.
"깜짝이야"
"아, 왔구나. 올 줄 알았지"
"어떻게?"
"네 성격에 내일 급하게 편집본 마무리해서 넘길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귀신이군"
"나 이거 마무리하면 같이 보게, 잠시 소파에 앉아 쉬어. 저 자리가 젤 따뜻해"
명주는 세진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고는 편집본으로 눈을 옮기며 이야기한다.
말은 못 하고 있었지만 세진은 친오빠의 재수 일 년의 결과를 확인해야 하는 시점이라 집이 더 불편했다. 엄마의 초조한 신경과 오빠의 긴장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학교로 나오니 숨을 쉴 수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가족이 너무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종종 힘겹다.
"혼자 어찌할까 고민이었는데 잘됐다"
"푹 좀 쉬세요. 너 이마에 '피곤'이라고 쓰여있어"
세진은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무겁던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마음이란 것에 대해 긍정할 수 있었다. 가족이 아닌 사람이 오히려 위안이 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창문은 뿌옇고, 실내는 온기가 가득했다.
두 달을 만나는 동안 명주의 눈빛이 조금 불안해 보이긴 했었다. 성격이 부산스러운 사람은 주변에도 많으니 괜찮다고 여기며 넘겼다. 워낙 에너지가 많은 사람들은 얼핏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약속을 정할 때마다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는 느낌이 든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세진도 굳이 사람이 많은 곳은 즐기지 않았으므로 괜찮았지만, 명주는 유독 낮을 피해 스케줄을 잡고 싶어했다.
주말에 낮잠을 실컷 즐기고 싶어서 저녁에 약속을 잡는 건가 싶었다.
싱글이라 저녁루틴으로 살고 있어서 아직 체력이 남아있나 보다고 생각했다.
보통 알고 지내는 젊은 싱글 친구들도 저녁에 만나고 싶어 하는 걸 떠올리면 그들만의 룰이 있을 거라 여겼다.
그날 와인바에서 급히 나와 헤어진 이후로, 부쩍 명주의 흔들리는 눈빛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심지가 다 짧아진 촛불처럼 부산스럽게 흔들렸다.
명주에게 위안을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차분히 이야기를 하려 해도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나서, 다급하게 돈이 필요하다고 전화가 온 건 일주일 전이었다.
"지금 잠깐 이백만 원이 필요해서 그런데, 이틀 뒤면 월급이 나오거든. 금방 갚아줄게. 이 계좌번호로 이체를 좀 해줘, 세진아."
사실 그 이백만 원 세진은 너무 보내주고 싶었다.
친구와의 추억을 생각하면, 세심하게 나의 안부를 묻고 궁금해해 주던 그녀를 보내지 않을 수 있다면 기꺼이 돈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입금을 하고 나면 이 관계가 끝나고 서로가 불편해질 거라는 예감이 너무 강하게 들었다.
"명주야. 미안한데, 내가 지금 여유자금이 없네"
"그래, 내가 다시 연락할게"
전화는 곧바로 끊겼다. 우리의 관계처럼.
이후로 며칠째 연락이 되지 않았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하루만에 사라져 버린 명주를 생각하니 화가 났다.
고작 이정도 였나, 내가 만만해서 일부러 내 앞으로 나타난 거였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복잡한 생각으로 얼굴에 뜨겁게 열이 났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퇴근길에 명주가 이야기한 편집 사무실 주소로 찾아가 보았다.
간판이 희미한 출입구로 들어서니 지하계단이 나왔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편집실이라 적힌 곳을 들어가 보니 책상이 하나 있고 옆면 책장에는 영성, 내세의 영원한 삶, 같은 문구가 적힌 얇은 간행물이 어지럽게 꽂혀 있다. 책 반대편 벽면에는 건강보조식품 박스가 사무실을 한가득 채우고 있다.
책상위 메모에는 명주의 손글씨가 적혀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글씨체.
그리고 유리판 아래에 있는 명함 하나, 그 이름이 눈길을 끈다. 편집부실장 황세미.
그때 와인바에서 찾던 황세미, 명주가 맞았구나. 너무 혼란스러워진 세진은 무섭게 편집실을 나와 계단을 뛰어올라온다. 바람이 차다. 겨우 숨을 쉴 수 있는 느낌이다. 심장이 급하게 뛴다.
도저히 이 거짓의 공간에 있을 수가 없는 기분이다. 시동을 걸어 집으로 향한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집에 가까스로 도착한 세진은 휴대폰으로 간판에 있던 업체명을 검색해 본다. 사이비 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사업체다.
고등학교 동창 은주의 연락처를 찾아서 명주에 대해 물어보자,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 명주? 이름을 바꿨을 거야. 세미? 뭐 그런 이름이야, 요즘 개명하는 사람이야 흔하잖아. 이십 년이 지났으니 지금은 또 다른 이름으로 바꿨는지도 모르지.
대학 때 쇼핑몰 사업을 하다가 빚이 좀 생겼다고 들었어. 주변 사람들한테 돈을 빌리다 연락이 다 끊기고.. 너도 조심해. 고등학교 때 친했으니 다시 연락올 수도 있어"
지옥 같은 일주일을 보내고 이제야 퍼즐이 하나씩 맞춰진다.
돈을 빌린 사람이 알아볼까 봐, 극도로 불안해하던 것이었다. 환한 곳보다는 어두운 곳을 굳이 찾아서 돌아다녔겠지. 명주는 얼굴이 드러나고 싶지 않았던 거였다.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어둠을 내내 택한 셈이었다. 이름을 바꾸고 과거가 잊혔다고 생각하며 살다가 다시 떠오르는 기억으로 괴로워했던 것 같다.
두 눈을 크게 뜨며 오해를 자주 산다며, 오히려 자신 있게 하게 이야기하는 명주의 표정이 떠오른다.
학생때도 긴장하지 않고 발표를 잘하고 친구들의 관심을 끌 수 있도록 이야기를 과장되게 곧 잘 하던 여유만만한 명주의 미소가 겹쳐진다.
당당해야만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몇 번이나 그런 거짓말을 하며 상황을 모면했을까, 그 자연스러운 모습에 무참하게 속은 사실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세진은 미세하게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있었지만 그 어색한 사실을 일부러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모르고 지내다 보면 작은 일들은 해결이 될때도 많았다. 사연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렇게 외면하며 불편한 감정은 누르며 명주와 약속을 잡았던 것도 같다. 오랜만에 찾아온 달콤한 시간을 이성이니 비판이니 하는 소리로 날릴 수는 없었다. 명주와 함께 있는 시간이 무엇보다 소중했으므로.
세진은 문득, 편집실에서 따뜻한 소파 자리를 권해주던 명주의 손짓을 떠올렸다.
다시 만난 명주는 분명 아직 그 온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세월이 명주를 그토록 어둡게 만들었을까. 친구를 잃은 마음이 서늘해진다. 처참했다.
마음속의 온기도 수분도 다 날아가버린 기분이다.
몸속에 기름기가 다 빠져서 피부가 바스락거리는 느낌이다.
휴대폰이 문자음이 울린다.
발신자 없음.
"우연히 너를 만나서 너무 반가웠어.
너한테만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었는데.. 상황이 좋아지면 연락할게.
미안하다."
끝나버렸다.
꿈같은 시간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다.
얼마나 급박한 상황이었으면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을 통째로 날려버려야 했을까.
명주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과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둘 중 어느 쪽도 헛헛함을 덜어주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 혼자만 반갑고 따뜻했던 것은 아니었구나, 생각하니 조금은 덜 억울하다.
받은 문자만큼의 온기만 내 속에 남았다.
가을날 깃털처럼 찾아온 내 마음을 간지럽히고 금세 날아가버린 서늘한 온기.
홀가분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인연이 나에게는 사치였을까,
긴 꿈을 꾸고 깨어난 기분이다.
설레던 여행이 끝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