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다
저녁이 다가오는 하늘을 바라보면 이유 없이 먹먹해질 때가 있다.
세진은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는 모습을 거실 창가에 서서 찬찬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 6시.
벌써 어두워지는구나.
며칠사이 아침저녁 기온이 훅 떨어졌다.
곧 다가올 겨울을 준비해야겠다.
두꺼운 이불과 카펫은 이미 나와있고, 롱패딩을 벌써 꺼내야 할까.
잠시 한눈을 파는 새 창밖은 어둑어둑해졌다.
엊그제 동생의 격노는 사실 예상하지 못한 일이긴 했지만, 둘은 늘 아슬아슬했다.
조마조마하던 일이 기어이 일어난 느낌이다.
무던하게 지나치는 일들이 가족에게서는 감정이 드러났다.
편하게 대하다 보니 불편한 감정들도 불쑥 불거져 나왔다.
그럴 때마다 세진은 감정에 넘쳐 불쾌함을 표현하더라도, 그 정도는 해도 된다고 믿었다.
세진이 손 걷고 나서서 대소사를 챙기지 않았다면 가족은 이전에 이미 소원해졌을 터이다.
그러면서 서서히 없던 일인 듯, 각자의 감정은 스스로 추스르고 끊어지듯 연락이 이어지다가 어느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 때 즈음 지난 만남이 잊힐듯한 시점에서 다시 서로를 마주했었다.
함께 만나 불거지는 느낌이 강렬하면 슬쩍 피하고 간신히 조절해 오던 사이였다.
수현이와의 감정의 골은 어차피 벌어질 만큼 벌어져 있었다. 서로 모르던 일도 아니다.
인터넷 전업맘과 직장맘의 싸움을 보며 동생과 세진의 모습이 대입되어 떠오르는 건 서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수현이 돈이 아쉬워서 더 기분이 나빴을 거란 생각은 못 해봤다.
늘 여행을 계획하고 고급 품목을 선택해서 남편을 잘 만나는 게 정말 중요한 거구나, 나는 왜 그걸 몰랐을까, 평생이 여유가 넘치는 팔자란 게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동생을 굴복시키려고 돈을 보냈을까, 나에게 그런 마음이 있었을까, 세진은 의심해 보지만 그런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어떻게 쓰는 줄 모르는 사람은 돈이라도 쓰는 게 맞는 일이었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마음 가는데 돈 가는 거야. 서운해하지 마. 네 고상한 취향을 내가 어찌 알고 선물을 하니? 돈이라도 보내는 거지.' 다음번엔 어색하더라도 잊지 말고 이 말을 건네야겠다.
어차피 설날 때까지 시간이 꽤 남았으니 그때까지 조심하면 뭐 특별히 신경 쓸 일이야 없을 테다.
소소하게 톡을 나누거나 통화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조금 아쉽지만 연락이 매번 반가웠던 것도 아니었다.
이따금 시시콜콜 다정하게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동료의 자매관계가 부러울 때도 있지만, 세진은 성격상 적당한 거리가 있는 사이가 편했다.
통풍이 되는 거리가 유지되어야 관계 안에서 편안하게 숨 쉴 수 있었다.
사흘 동안 멍하니 기운이 빠졌었는데 생각을 할수록 오히려 잘되었다는 기분이 든다.
새삼 달라질 것도 새로울 것도 없었다.
그냥 각자의 방식으로 저절로 아물어지게 기다리자.
다음 기회가 있으니 만회하면 된다는 것, 가족 구성원에게 가질 수 있는 여유란 그런 것이었다.
길고 가느다란 한 줄기 신뢰도 있다.
생각해 보니 더 조심스럽고 건강한 관계가 될 것도 같다.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명주에게 카톡을 보낸다.
세진 : 이번 주말에 시간 돼? 이 가을 끝자락을 함께 느껴보는 거 어때?
명주 : 오오 좋지.
세진 : 남산이나 덕수궁에서 좀 걸을까? 햇빛도 좀 쏘이며 광합성을 하고 싶네.
명주 : 앗, 미안. 낮엔 잠깐 약속이 있고 저녁시간은 안돼?
세진 : 그럼 좀 이른 저녁을 같이 먹는 거 괜찮아?
명주를 우연히 마주친 건 두 달 전이었다.
모처럼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일본식 라멘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을 때였다.
대기 줄이 있어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앞에서 이야기하는 분 얼굴이 왠지 낯이 익다.
살며시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혹시, 저희 아는 사이죠?"
상대방은 갑작스러운 물음에 좀 놀라는 표정을 짓다가 세진의 얼굴을 천천히 쳐다보았다.
"어머, 저도 얼굴이 눈에 익는데 우리가 동창일까요? 중학교 어디 나오셨어요?"
출신 초중고 학교이름을 다 대며 대조해 본 결과,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둘은 각자 다른 테이블에 안내받으며 급하게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다시 약속을 정하고 만났을 때 둘은 공백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이야기가 잘 통했다.
"진짜 반가워. 이게 무슨 일이야,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우리가 모르고 지냈구나"
같은 나이에 느끼는 공허함을 서로 이해했을까, 울컥 반가웠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산다는 명주와의 대화는 많은 부분이 입장이 다르고 조심스러웠지만 이야기를 할수록 인류애와 대동단결로 모아졌다.
마음이 넓어지고 시야가 확장되는 느낌이 좋았다.
매번 똑같은 사람과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는 신선함이 너무 반가웠다.
비슷하게 멀어진 시선으로 이야기 나누다 보니 무슨 일이나 장단점이 있고 둘이서 내리는 결론은 '사는 거 정말 별거 없네' 이거나 '사람이 사람이지'였다.
무엇보다 마음이 즐거워지는 이유는 잊힌 학교 때 몽글몽글했던 감정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
"너 옛날에 신승훈 좋아하지 않았어?"
"맞아, 그 오빠 진짜 좋아했었지. 지금 나오는데도 멋있더라야, 늙지도 않고. 연예인은 역시 관리가 남다르니까"
스산해지는 가을바람을 맞으며 둘은 하릴없이 걸었다. 내일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처럼.
가로등 불빛이 밝혀주는 어둑한 길은 왠지 모를 편안함을 주었다.
나의 존재를 감추고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기분이었다.
"너 도서 출판 쪽에 일하고 있다니 부럽네. 우리 같이 편집 부였었잖아."
"출판은 이제 죽는 산업이라 미디어를 다시 배우라고 하네, 팀장님이. 영업도 내가 해야 되고, 굿즈도 팔아야지. 생활고에 힘들다."
"죽으라고 시키는 일만 반복하는 나로서는 그런 고민 멋있게 들리네."
코트를 뚫고 들어오는 바람이 차게 느껴진다. 폐 속으로 훅 들어온 찬바람이 갈 곳을 잃었다.
"에에취이!"
세진의 깊은 기침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
"아이고야, 한번씩 마른기침할 때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
"맞아. 기침 한번 하는데 온몸이 탈탈 털려서 눈, 코, 입은 말할 것도 없이 모든 근육이 다 풀려버리는 느낌. 어휴, 내 존엄이 사라진 느낌이랄까"
"진짜 늙고 병들고 서럽고 아쉽고.. 하하하."
"어디 들어가자. 요 주변에 뱅쇼 하는 집이 있었는데, 잠깐만."
싱글라이프를 오랫동안 유지한 명주는 역시 세진보다 아는 맛집이 많았다.
명주는 휴대폰에 눈을 고정한 채 너무도 자연스럽게 길을 걸었다.
명주가 이끄는 대로 세진은 따라 걸었다. 다음 행선지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도 너무 편했다.
좁은 골목으로 찾아 들어간 와인바는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입구가 숨겨져 있었다.
지하 계단을 내려가자 나무 간판에 작은 글씨로 가느다랗게 '비밀 화원'이라고 적혀있었다.
내부 조명이 어둡고 몇몇 테이블에 사람들이 앉아 조용조용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주 예전에 오던 곳인데 아직 영업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저기 안쪽으로 들어갈까? "
구석진 곳으로 자리 잡고 앉아서 시나몬 향이 뭉근하게 퍼지는 뱅쇼를 홀짝였다.
추위에 굽은 몸이 깃털처럼 하나씩 펴지는 느낌이다.
"아, 한 모금으로 피로가 가시는 기분이네"
"여기 사장님이 나름 괜찮은 와인으로 뱅쇼를 끓여주시더라고"
명주는 영업실력이 뛰어난 세일즈맨의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세진의 반응에 흡족한 표정을 보였다.
"잠시만요. 황세미 씨 아니세요? "
회색 코트를 입은 키가 큰 남자가 성큼 걸어와서 테이블 앞에 구부정하게 섰다.
"어머 아니에요. 닮은 사람이 있나 봐요"
명주는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눈빛이 초조해 보였다.
훤칠한 키에 눈빛이 훈훈한 남자는 명주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제가 좀 평범한 얼굴이라 그런 오해를 좀 자주 삽니다만"
허리를 펴고 고쳐 앉으며 진지한 톤으로 정색하며 말하는 명주의 표정에는 비장함이 느껴졌다.
잠시 후 적막을 깨고 어색하게 그 남자는 돌아섰다.
"실례했습니다"
"아쉽네. 아는 사람이면 좋았을 텐데. 잠깐 합석이라도 하자고 할걸. 내 타입이던데"
새로운 얼굴의 등장에 세진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분위기에 마냥 들뜨는 기분이었다.
그 남자가 떠나고 난 뒤 명주는 어딘가 숨어야 할 곳을 찾는 작은 동물처럼 부산스러워했다. 눈빛이 너무 불안했다.
"무슨 사연 있는 사람처럼 왜 그래?"
"우리 나갈까?"
세진의 농담도 들리지 않는지 명주는 서둘러 나가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