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화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꿈꿀 수 있는 자유

by 소설

"독감이 올해 너무 유행해서 학부모님 민원이 있으니까, 이번 달 가정통신문 보건자료 좀 신경 써서 작성합시다. 내일 점심까지 초안 전달해 주세요. 지난번처럼 챗지피티 돌린 티 안 나게 아시죠? 이세진선생님?"

"네에 교감선생님"

독감유행이야 늘 있던 일 아닌가, 무슨 새로울 게 있나,

손 씻기, 개인위생, 수면과 영양, 규칙적인 생활습관... 늘 같은 내용이다. 특별한 묘약은 없다.

신선하게 전달할 만한 포맷을 찾아보고 있는데 동생에게 카톡이 왔다.

휴대폰 텍스트가 희미해 안경을 머리 위로 올린다.

눈을 몇 차례 깜빡이고는 눈을 더 가늘게 떠본다.

이럴 때마다 휴대폰을 큰 글자 모드로 변경할까 고민하지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다.

조금만 더 버텨보자.


수현 : 나 미술공방 하나 내는 거 어떻게 생각해?

세진 : 미술학원? 아파트 단지 상가에?

수현 : 이미 잘 되는 어린이 미술학원이 있어서 아파트 단지는 어려울 거 같고, 성인 대상으로 캘리그래피나 수채화 같은 거 그리는 주부반이나 단체전 준비 같이하는 공방? 함께 차 마시고 주말은 맥주도 마시고 동아리 모임도 진행하는 그런 공방말이야.

'꿈꾸고 있네' 속마음이 훅 터져 나왔지만 참는다.

세진 : 월세 감당이 되겠어?

수현 : 낮에는 어린이를 좀 받아야 하나? ㅎㅎ

세진 : 네가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지 말고 사람들이 원하는 걸 해야 돈이 벌리겠지. 팔자 좋은 농담 그만하고, 나 근무할게.

세진은 아침부터 피곤해서 그런지 말이 곱게 나오질 않는다.

수현 :.... 그래, 아파트 후문 좀 아래쪽에 주택 임대가 나와서 생각해 본거야. 현실이 가혹하네.


꿈만 꾸는 동생은 매번 이런 식이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인생을 좀 책임지고 살라고 누군가 호되고 얘기를 해야 정신을 차릴까 싶다.

수현은 세진보다 두 살 어린 집안 막내여서 애교가 많고 어리 냥이 심했다.

엄마는 항상 그녀에게 동생을 잘 챙기라고 가르쳤다.

K - 장녀에게 들려주는 엄마의 이야기라는 게 늘 그랬다.

엄마의 가사노동을 덜어줄 수 있도록 야무지게 가르쳐야 할 대상은 둘째 딸이었다.

집안을 관리하고, 아빠와 오빠, 동생을 살뜰히 챙기도록 세세하게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사람도, 엄마의 억울한 하소연에 귀 기울여줄 상대도 늘 만만한 둘째 딸이었다.

아들은 엄마의 말을 우습게 여기는 듯했고, 막내는 설명을 늘어놓기에 너무 어렸다.

귀여운 동생이긴 했지만 오빠에게 가지 않는 짐이 항상 세진에게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오빠 정민이 이혼하고 나자 집안에서 세진의 무게감은 더 무거워졌다.

가족 대소사에 오빠는 늘 예외가 되었고, 독일에서 오래 살았던 동생은 한국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만 했다.

수현은 어릴 땐 언니를 잘 따르고 늘 도움을 받고 싶어 했지만, 크고 나니 달라졌다.

성인이 되자 두 살 차이는 크게 우월하지 않았고 학교성적도 사회적 관계에 별 중요한 요인이 되지 않았다.

미술교육을 전공했던 수현은 임용고시에 떨어져 몇 년을 전전긍긍하다가, 학교 때부터 연애하던 남자와 결혼해 독일로 떠났다.

노는 부류가 다른 느낌이었다.

형제자매가 실생활에 별로 도움이 안 되었다.

'만약 내가 간호학을 공부하지 않고 미술교육을 전공했더라면 어땠을까'

고민해 보았지만 겁이 많고 평범한 것을 좋아하는 세진은 책임감 있는 미술교사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과 별반 달라진 건 없을 것이다. 위험을 싫어하는 성격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운명이었네, 훗'

엄마가 늘 읊조리는 '성격이 팔자'라는 말이 가슴에 콕 들어와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허무했다.


엄마의 생신날 세 남매의 가족이 대전에 사는 동생네에 다 모였다.

동생은 동네에서 제일 학군이 좋다는 타운하우스에 산다. 구부러진 드라이브웨이를 지나 집 앞 작은 정원들의 장식을 보면 어느 영국의 시골 마을로 들어선 기분이다.

집안 장식은 더 유럽식이다. 쾌적한 우디향이 현관에 퍼진다.

마호가니 6인 식탁 위에 깔끔한 자수 리넨, 포트메리온 접시에 담긴 과일들.

'이런 건 대체 어디서 사 오는 걸까'

백화점이나 아웃렛 매장에서 세진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아이템이 동생 집에는 가득하다.

시간이 많으니 온종일 빈티지 샵이며 온라인 수입대행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나보다.

아름다운 샴페인 글라스에 화이트 와인을 따르며 수현은 한껏 기분이 좋아진 모양새다.

"형부 운전하고 오시느라고 힘드셨죠?"

남편한테 예쁘게 눈웃음을 짓는다.

"아니야, 대전이 의외로 금방이네. 처제"

남편은 사람 좋은 표정으로 와인을 받는다.

그 모습에 욱 했다.

"넌 제발 철 좀 들어라. 언제는 북카페를 한다더니 이번엔 뭐 미술공방?"

세진의 입에서 말이 곱게 안 나왔다.

수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정적을 깨듯 세진이 급히 덧붙였다.

"그래서 공방 차릴만한 데가 있다고?"

하지만 이미 분위기는 얼어붙은 뒤였다.

옆에서 엄마가 괜히 끼어들었다.

"정서방 열심히 버는 돈 까먹을 궁리 말고 그냥 살림이나 해. 수현아, 지금 와서 무슨 공방이야."

결국 수현이 폭발하고 만다.

"둘이서 왜 그래 진짜? 마흔 넘어서 내가 집중하고 싶은 거 하나 찾겠다는데. 사사건건, 그것도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이게 할 말이야?"

"엄마 생신인데 기분 좋게 보내자"

이 말이 동생의 심기를 더 건드렸다.

"언니는 말이 그게 뭐야. 돈이 되는 걸 하라고? 나도 벌고 싶으니까 하는 얘기잖아. 그리고 언니는 돈이면 다야?"

"그건 또 무슨 얘기야?"

"한 번씩 그럴 때마다 돈으로 덮으려는 거 모를 줄 알고? 상처 주는 말 나한테 다 뱉어놓고, 며칠 지나면 괜히 크리스마스니 뭐니 애들 학원비하라며 30만 원, 50만 원씩 보내는 거. 어쩜 돈 못 벌어서 용돈 아쉬운 줄 알고 그리 보내는지. 고맙지만, 정말 기분 상했어. 돈으로 입 막으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거지? 벌면 다야? 정말 기분 나빠."

세진은 정곡을 들킨 듯 얼어붙었다.

세진은 동생이 꿈꾸듯 신나 하며 얘기하는 말과 표정이 꼴 보기 싫었다. 툭툭 비아냥대는 말이 계속 나왔다.

수현의 표정이 사그라들고 조용해지면, 미안한 마음이 커져서 동생에게 돈을 보냈다.

그러면 마치 그 일이 덮어질 것처럼.

둘 사이에 아슬아슬 쌓여있던 감정이 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맘껏 분출했다.


"왜 이래.. 우리 그만 돌아가야겠다. 이런 얼굴로 저녁 같이 먹겠어?"

세진은 준비했던 봉투를 테이블에 던지듯 두고 집을 뛰쳐나갔고, 남편이 급하게 뒤따라 나온다.

"같은 배에서 나왔는데 어쩜 이렇게 다를까"

엄마가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뭘 해보는 거 어떨까 그냥 묻지 말고 지가하고 싶은 걸 하면 될 텐데 가죽만 남은 듯이 사는 나를 약 올리려고 그러나 싶을 때가 있다고, 꿈이 많아 좋겠다. 너는'

그 말은 끝끝내 못 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다채롭게 물든 낙엽들이 바람에 날려 후루룩 떨어지는 걸 바라본다.

운전석에 남편이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냥 좀 자. 도착하면 깨울게"


세진은 눈을 감고, 갈색으로 시들어 바스락 말라버린 낙엽이 머릿속에서 조용히 흩어지는 장면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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