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제 모르겠습니다
"웻지우드보단 빌레로이 앤 보흐가 낫지않아?"
"그래?"
"응, 언닌 웻지우드 사면 모셔놓고 못 쓸거같아. 두꺼운 컵이 막쓰기에 낫지.
디시워셔에 그냥 돌리고. 근데 요즘은 폴란세라미카도 많이 쓰던데, 튼튼하고 귀여워"
세진은 차가워진 가을바람에 스산한 기분을 녹여볼 마음으로 거품을 듬뿍 올린 라떼를 마시려는데 동생 수현에게 전화가 왔다.
독일에서 유학한 여동생은 아무래도 물건 고르는 안목이 남다르다.
고급 브랜드에 대한 지식도 뛰어나서 쇼핑이 필요할 때 종종 물어보기는 한다.
동생이 백화점에서만 보는 브랜드 이름을 줄줄 읇으며 품평을 시작하자 세진은 괜히 카톡으로 그릇 얘기를 꺼냈나 후회스럽다. 전화통화를 마무리해야 할 시점이다.
"맘에 드는게 있나 좀 더 검색해봐야 겠다.
발품 팔 에너지는 없으니 손품을 팔아야지"
"응, 인터넷이 싸. 그래도 실제로 매장에서 봐야 느낌이 오는데.
'이 그릇이 우리 집에 들일 아이가 맞는지'
암튼 내가 링크 보내줄게, 언니야. 내 추천아이템이랑 같이"
전화를 끊고 세진은 한쪽 눈썹을 가볍게 올리고는 작게 코웃음을 친다.
'츠, 내 돈으로 내가 사겠다는데 뭐래.'
내 취향이 촌스럽다고 돌려 말한 것 같아, 기분이 잠시 불쾌하다.
언니를 우습게 여기는 것도 같다.
어떨땐 수현의 소비 욕구를 대신 풀어주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지난번 세진의 집뜰이때도 동생은 고급 포장 케이스에 싸인 디퓨저를 내밀었다.
"레이지 선데이 모닝, 메이슨 마르지엘?"
"언니, 메종! 메종 마르지엘라!"
"어머, 불어였구나."
이 브랜드 모르냐며 쳐다보는 수현의 눈빛을 피했다. 세진의 귀가 순간 빨갛게 달아올랐다.
일부러 저러는건 아니겠지, 생각하며 넘겼지만 기분이 좋을리는 없었다.
그 디퓨저 향은 사실 세진의 마음에 꼭 들었다.
깔끔하면서 포근한 냄새,
좋은 호텔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났다.
산뜻하면서 가볍지 않은, 고상한 느낌.
'이래서 사람들은 이런 데 돈을 쓰는 구나' 싶다가도,
'이름도 참 잘 지어, 게으른 일요일 아침 같은 향이라니 - 지갑이 스르르 열리겠네' 하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생글생글 웃으며 자기 혼자만 귀족인 냥 스카프를 고쳐매며 식탁의자에 꼿꼿하게 앉아있던 수현의 당당한 모습이 떠올랐다.
괜히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입은 내 모습이 비교되는 것 같아 어깨가 축 늘어진다.
'흐음'
라떼를 한모금 마시다 말고, 머그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거품은 이미 녹고, 커피는 차갑게 식어있었다.
세진은 무던했다. 늘 평범한 걸 선호했다.
공무원 아빠의 둘째딸로 태어난 세진은 아기때부터 순했다.
세살 많은 오빠를 따라 열심히 공부했고, 고만한 살림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게 취직이 잘 되는 간호학과를 선택했다. 합격소식을 알렸을때 엄마가 너무 반가워했다.
병원 근무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의사한테 시집가려고 간호사가 되신거예요?"
지나가는 누군가의 한마디가 가슴을 쿡 찔렀다.
스케쥴도 벅찬데 희생정신이 강요됐다.
근무 분위기가 학교와는 달랐다. 느긋한 성격에도 맞지 않았다.
'여왕벌'이라 불리는 선임간호사와 같은 나이트 근무조였던 날,
하루종일 심장이 두근거려서 출근을 할 수가 없었다.
열두해 학생기간 동안 질병결석도 없던 세진은 생애 최초로 무단결근을 했다.
그 다음날부터 보건교사 임용시험책을 폈다.
학교도 환경은 비슷했지만, 교직원 연금이 그녀의 마음을 붙잡아 주어었다.
직장생활이라는 게 어차피 비슷하다면 버티는 옵션을 고려해야 했다.
미래가 보장된다고 생각하니 교감선생님의 꼰대 소리도, 학부모의 민원도 그럭저럭 넘길 수 있었다.
또래 교사들과도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무난하게 지냈다.
사람은 사람일 뿐이고 감정은 담아두면 손해될 뿐이라는 생각이 컸다.
"체육 김쌤 얘기 들었어요?"
윤리선생님이 보건실 문틈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속삭였다.
"무슨 얘긴데요?"
"조기퇴직하고 요가샵 차리신대요.
나이 50 넘으면 용기 못 낼 것 같아서,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나?
남편분이 많이 버시긴 하나 봐요."
"그래도 정년 채우는 게 나을 텐데… 요가샵은 수입도 불안정하지 않아요? 계절도 탈 것 같고."
"뭐, 김쌤은 학교에 묶여 있기엔 너무 열정적이긴 했잖아요.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까웠대요."
"그런 에너지… 저도 부럽긴 하네요.
저는 그 에너지가 다 어디로 증발했나 몰라요."
건조해진 손등에 핸드크림을 듬뿍 바르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세진은 사실 부럽지 않았지만, 맞장구 정도는 쳐주었다.
점심을 먹고 학교 뒤편을 걸었다.
은행잎이 쌓인 바닥이 노랗게 빛나고, 햇살은 따뜻했다.
그 시간은 하루 중 세진이 가장 아끼는 시간이었다.
가을 하늘이 맑은 오늘 같은 날은 더더욱 의식을 치르듯이 나가서 산책을 했다.
“학교에서 보내는 게 아깝다”는 말.
그건 세진이 한 번도 가져보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더 오래 마음이 머물렀다.
세진이 중학생이었을때, 생물시간에 중년의 여자 선생님은 오징어의 내장기관을 설명하며 말했다.
"오징어는 여자들이 좋아하잖아. 마른 오징어. 먹기 편하고 치울거 없으니 좋지."
'흥, 저런 이유로 취향이 정해진다니.'
세진은 그날 결심했다.
오징어를 좋아하는 여자가 되지는 않으리라.
기혼 여선생님들이 수업시간에 흘려 이야기하는 여자의 살림, 여자의 현실 레파토리는 지루하고 서글펐다. 서사가 없고 따분했다. 비슷한 레파토리가 반복되었다. 열일곱 세진은 저들과 다른 세상을 펼칠 거라 믿었다.
누가 그랬던가,
마흔이 지나면 운명론자가 된다고.
끼니 하나 준비하는 데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든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퇴근 후 국을 데우고, 반찬이 떨어지지 않게 주문하는 것도 노력을 꽤 요하는 일이었다.
먹고 나서 치우는 일은 또 왜그렇게 힘든지.
그나마도 아기를 낳고 나서 식사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저 허기를 채우는 데 급급했던 날들이 이어졌다.
아이들이 자라고 그들에게 취향이라는게 생겼다.
그 기호에 맞는 음식을 준비하는 일이 에너지를 아낄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었다.
치킨, 떡볶이, 피자, 마라탕을 돌려가며 먹었다.
너무 긴 세월을 그렇게 보냈다.
출퇴근길 바람이 차갑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얼굴에서는 열이 났다.
체온조절 신경계에 문제가 있나 싶을 정도로 땀이 많이 날 때도 잦다.
몸이 축축 처지는 날이면, 세진은 집에서 캔맥주를 하나 딴다.
오징어는 싫어서 아귀포를 씹는다.
짭조롬한 아귀포가 시원한 맥주를 부른다.
아귀포 몇 조각과 캐슈넛, 피칸을 작은 나무 그릇에 담으며 문득 생각한다.
나도 그 생물 선생님처럼 따분해진 건가,
그 선생님은 정년까지 채우고 은퇴하셨을까.
맥주를 천천히 비운다.
똑같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오늘 하루를 무난하게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