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화 짧아진 계절

그녀를 기분 나쁘게 하는 것들

by 소설

- 식은 커피

- 아침부터 느껴지는 찌뿌둥한 목, 어깨의 통증

- 묵직한 두통

- 주말 커피숍에서 보이는 연인들의 찐한 애정행각

- 내가 청소 솔으로 닦아내지 않는 이상 절대로 깨끗해지지 않는 욕실 세면대

- 축축해진 욕실 발 매트

- 저녁이면 흐릿하게 보이는 휴대폰 글씨

- 어깨 움직임이 불편한 핏이 예쁜 재킷

- 살가운 듯 기분 나쁜 여동생의 통화

- 매번 바뀌는 남편의 출장 스케줄

- 자녀의 긴급 SOS, 라이드 요청

- 본인이 친한 줄 알고 내 기미에 대해 품평하는 옆집 언니

- 선 넘는 이야기로 불편하게 하는 기 센 헤어숍 원장

- 나를 불편해하는 표정이 역력한 젊은 동료

- 매번 늦으며 내 눈빛을 피하는 독서동아리 노처녀 멤버

- 수영장 코치의 불편한 터치

- 덩치 큰 상사의 고압적인 태도

- 여자가, 또는 남자가, 로 시작하는 젠더감수성 제로인 길고 긴 이야기

- 호주여행 다녀왔다며 시누가 전해 주는 싸구려 열쇠고리

- 들떠서 20분째 늘어놓는 동료의 개인적인 하소연

- 절대로 먼저 연락하지 않는 동창 친구들의 단체톡방

- 내 아이를 위아래 훑어보는 듯한 시어머니 눈빛

- 혀 짧은 소리로 조곤조곤 자신의 어린아이를 야단치는 앞동 젊은 엄마

- 내 경상도 악센트를 어색하게 흉내 내는 학부모 모임 동네 엄마

- 편해 보이지만 역시 발가락에 피로가 전해지는 로퍼

- 대화 중에 떠오르지 않는 대명사들

- 오랜만에 모여서 식사하는 레스토랑에서 휴대폰만 보는 가족들

- 갑자기 변하는 체온변화에 폭발하는 구슬땀을 조절하지 못하는 땀샘


이러한 사소한 일들이 그녀의 하루를 흔든다.

조용히, 그러나 꾸준하게.

세진은 한숨을 쉬며 요가복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드디어 금요일.

저녁 빈야사 수업을 듣고 나면 온몸이 가벼워지리라.

상냥한 요가 강사가 친근하게 인사를 전한다.

"오로지 내 몸에 집중하고 내가 바라는 그림을 머릿속으로 그려봅니다."

부드럽지만 전달력 있는 목소리가 그녀를 차분하게 만들어준다.

홀로 천천히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얼굴 주름이 펴진 느낌이다.

역시, 운동은 진리야.

"선생님, 오늘 수업 너무 좋았어요. 주말 잘 보내요"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온다.

하늘이 깜깜하다.

해가 이렇게나 짧아졌구나, 그녀의 머리카락을 지나는 바람이 차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에 보면 그런 장면 있잖아요. 엄마가 장독뚜껑을 높이 올려서 파사삭 깨뜨리는 장면, 완전 카타르시스."

"맞아 맞아. 나는 우치다테 마키코의 '곧 죽을 거니까'에서 남편의 종이작품을 손으로 찢다가 봉지에 넣어서 수장시키는 장면, 검은 염색물이 죽죽 흘러내리는 묘사에서 이상하게 분노가 해소되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남편에 대한 분노는 물리적으로 해소해야 되나 봐요 하하"

독서동아리에서 가을빛을 느껴보자며 마로니에 공원에서 모임을 가졌다.

야외에서 만나니 시원한 바람결에 자유롭게 편한 이야기가 더 많아진다.

"저 초록초록하던 나뭇잎들이 어느새 이런 화려한 빛깔로 변한 건지 참 신기해."

바닥에 떨어진 노랗고 붉은 낙엽들을 쳐다보며 모임장 언니가 이야기한다.

"수분이 날아가서 홀가분하겠죠. 낙엽은?"

"물이 생명력이잖아요. 가벼워서 기분 좋으면서 아쉬울 거 같아요."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자박자박 밟으며 세진은 달큼하고 고소한 냄새를 한껏 마셨다.

곧 다가올 겨울이 떠올랐다.

그래서 더 깊이, 지금 이 순간의 향을 머금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