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화 그들의 온도

당신이 그러면 안 되잖아

by 소설

저녁 퇴근길에 눈이 조금씩 날리더니 집에 도착할 즈음 바닥에 쌓이기 시작했다.

추운 건 너무 싫지만 새하얗게 변하는 풍경이 살짝 마음을 움직인다.

매일 보던 그 길이 잠깐사이 이렇게 동화처럼 달라 보이다니, 허용하는 마법이란 이런 눈 정도이다.

'드라마틱하게 바뀌는구나'

먼저 집에 와 있는 남편이 반갑게 맞아준다.

"오늘 첫눈이네. 오는 길 괜찮았어?"

"응. 긴장을 하고 운전해서 그런지 두통이 있는 것 같아. 나 먼저 좀 쉴게"

"밥 하기가 싫은 게 아니고?"

농담이라며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그 모습이 너무 싫다.

둘 사이 밥하기의 길고 긴 서사는 민감하면서도 매일 맞닥뜨리게 되는 주제다.

'빈 말이라도 꼭 저렇게 해야 할까'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길고 지겨운 싸움이다.


남편은 연애할 때 누가 봐도 훌륭한 신랑감이었다.

다정한 가정에서 자라 구김이 없고 소탈했다.

남편은 누구에게나 선선하게 대하고 억지스러운 면이 없었다. 자연스러웠다.

친절하고 배려가 넘쳤다.

만날 때마다 편안함이 느껴졌고 따스하게 감싸주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이십여 년 전 어느 햇살이 좋은 겨울날 도서관에서,

세진은 손에 든 외투에서 휴대폰을 찾느라 호주머니를 뒤적이는데 손에 들고 있던 책이 툭 떨어졌다.

뒤쪽에서 걸어오던 남자가 경쾌한 걸음으로 다가와 책을 주워준다.

"어이쿠, 저도 이 책 재미있게 읽었는데 어떠세요?"

"아, 네. 저도 재미있어요."

지훈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어 한다.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혹시 읽으셨어요?"

"아니요 아직"

세진은 훅 다가오는 남자의 관심이 부담스러워졌다.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졌다.

일부러 다른 층을 급하게 누른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엘리베이터를 나선다.

"저 먼저.. 갈게요"

엘리베이터를 내리고 나서 아쉬워하는 남자의 얼굴이 겨우 보였다. 안도의 한숨.

"다음에도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차가운 바람이 부는 날 도서관에서 다시 만났을 때, 지훈의 편안한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반가웠다.

"예전에도 뵜었는데, 이 동네 사시나 봐요?"

"네. 반가워요"

그 남자의 편안한 표정에서 친밀감이 느껴졌다.

"같이 차 한잔 마실까요?"

지훈은 그녀의 제안에 환하게 웃어 보였다.

엘리베이터 사이로 보이던 지훈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북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서로 비슷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네, 아래층 북카페로 가시죠? 여기 얼그레이 까눌레 맛있습니다. 혹시 에그타르트 좋아하시나요?"

다정다감하게 묻고 챙겨주는 모습이 좋았다.

두 손으로 머그잔을 쥐며 따뜻한 온기를 한껏 붙잡아본다.

달콤함과 함께 느껴지는 쌉싸르한 얼그레이 향이 입안에 가득 퍼지며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주변 공기가 따뜻해지는 느낌이다.

세진을 향해 몸을 기울여 해맑게 이야기하는 지훈의 모습이 너무 익숙한 느낌이라 신기했다.

상상 속 회로의 역할이었을까, 정해진대로 자연스럽게 흐르는 만남이 오랜만에 여유가 느껴졌다.

그 남자는 마음 한편의 휴식이 되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지훈은 세진의 옆에서 버퍼역할을 충실히 해주었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잔뜩 긴장한 모습이 힘겨워 보이면 세진을 데리고 나가 숨 쉴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 줬다.

"같이 나가서 뭐 좀 사 오자"

둘이 함께 바람을 쐬고 돌아오면 세진은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세심한 배려도 좋지만 믿어도 좋은 든든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차츰 들었다.

그렇게 두 번의 겨울을 함께 보내고 지훈의 가족에게 인사드리러 갔을 때 부모님은 세진을 살갑게 맞아주셨다.

친정 가족과는 다르게 세진에게 '고맙다, 수고했다'는 말을 꼭꼭 해주셨다.

일생에 처음으로 주인공이 되는 기분이었다.

손님으로 맞아주시는 어른들의 대우가 고맙게 느껴졌다.

서로 조심하며 시집에 들르는 손님역할은 정말 만족스러웠다. 오랫동안.


20년이 지난 지금도 시부모님의 다정함은 여전했다.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한결같이 예의를 지키는 모습에서 세진이 아무리 애써도 이 가족의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 한순간 또렷하게 느껴졌다.

아들을 특히 사랑하는 짙은 마음이 느껴질 때면 혼자 겉도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또다시 스무 해를 함께 보내도 외부 사람으로 남겨질 사실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감사한 만큼 서운하게 느껴졌다.


남편도 변함없이 좋은 사람 그대로였다.

그는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세진이 그에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그 시점에 옆에 있던 사람이 누구였든 그 사람에게 똑같이 다정하게 대했을 터이다.

그냥 그렇게 이어지는 인연이라는 게 허무했다.

서운한 마음이 들었으나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복에 겨워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외로움은 오로지 혼자의 몫이었다.

남편만큼 세심하지 못한 모습에 자격지심이 생기는 것일까 의문도 들었다.

따스한 모습에 쉴 수 있다고 생각한 그의 존재는 세진의 결핍을 더 확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지훈의 긍정적인 면이 좋아서 그를 모방하는 그림자 쪽을 택한 건 세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생긴 이후 둘의 관계의 결은 조금씩 달라졌다.

두 번의 육아 휴직동안 자연스럽게 가사노동과 육아는 세진의 몫이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함께 결정하던 일들이 모두 세진이 알아서 처리하는 일이 되었다.

말하지 않고 해 버리는 편이 빨랐고 덜 피곤했다.

서로 모르는 채로 급한 일을 빨리 해결하는 편이 효율이 좋았다.

소모적인 대화는 신경만 자극할 뿐이었다.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한 의무나 책임이 더 큰 영역을 차지했다.

부부란 제일 피로한 얼굴을 서로에게 보이는 관계 정도일까,

'이게 다 일까'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이 느껴졌다.


매일 같은 공간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에게 의도치 않은 안쓰러움을 불러일으켜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 같다.

그의 좋은 성품을 내가 균열시켰을까.

혼자 곱씹다가 억울하고 불쾌했던 기억들이 봇물 터지듯 밀려올 때가 있다.

과거의 기억이란 예고도 없이 감정을 순식간에 장악했다.

남편이 세운 기준에 맞춰 강요받았다는 기분이 들 때면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다.

한 사람을 이렇게 철저히 싫어할 수 있는지 스스로도 낯설 만큼.


세진이 거실로 나왔을 때 지훈은 식탁에 앉아 가벼운 저녁을 차려먹고 있었다.

"우리 잠시만 따로 시간을 좀 가지는 거 어떨까?"

"난데없이 무슨 말이야?"

"애들도 곧 독립할 테고, 나도 온전히 혼자 지내보는 거 어떨까 싶어서"

지훈은 잠시 수저를 멈췄다가, 세진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싶은 듯 허공을 응시하며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창밖으로 소복이 쌓이는 눈이 밤풍경을 더욱 몽환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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