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화 그녀의 두 번째 버전

화장대 앞

by 소설

기어이 친정엄마는 김장을 하시겠단다.

지난해에도 분명 '이제 정말 담지말자, 내년에는 제발 사 먹자'라고 약속을 했었다.

그냥 다른 사람 들으라고 빈말을 그렇게 했을까 싶다. 배추와 마늘이 좋아 보여서 사 올 수밖에 없었단다.

할 수 없이 남편과 함께 친정집으로 출동했다.

어쩔 수 없이 부리는 권력, 엄마의 달콤한 유혹이었을지도 모른다.

어깨와 허리가 아프도록 나르고 무치고 정리하고 남편은 먼저 서울로 보내고 엄마와 둘이서 한 끼 식사를 차려먹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엄마는 외로운 듯 자유로워 보인다.

아버지의 공무원 연금은 엄마에게 경제적 여유와 함께 가사노동의 해방을 제공했다.

한 번씩 시작되어서 끝이 날 줄 모르는 엄마의 하소연을 듣고 있자면 한쪽이 죽고 나서도 부부간의 애증은 지속되는 것 같다.

아니 영원히 전승되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자식의 뇌리에 또 자국을 남긴다.


"어휴, 무슨 사람이 로봇도 아니고 운동시간, 식사시간, 낮잠시간을 매일같이 맞춰서 해야 하냐고. 너네 아빠 진짜 옆에 있는 사람을 괴롭히는 데는 아주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니까"

"아빠는 규칙이 있어야 마음이 편한 사람이었겠지. 칸트도 그랬다잖아. 산책을 나오면 동네사람들이 시계를 오후 2시로 맞췄다고"

"연금이 딱 정해진 시간에 들어오는 것도 징그러워. 정말"

"그건 안 미뤄줘서 고마운 거네. 엄마"

"죽어서도 나를 쥐고 흔드려고 간을 보는 것 같다니까. 아주"


아빠의 월급에 기대어 생활해야 하는 엄마는 괜히 스스로가 비루해졌다.

엄마의 마음을 평생 옹색하게 만들었던 아빠의 얇은 월급봉투.

이젠 유족연금으로 아빠의 그늘 자리에 아직 머물러 있는 듯하다. 계속 그러겠지만, 엄마를 울타리 안으로 갇혀있게 만드는 사람은 엄마 자신이었다.


"엄마 돈이니까 그냥 마음껏 쓰세요. 누가 간섭할 것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은 또 연금 액수가 얼마인지 왜 그리 궁금해하는지 참나."

"나 그만 가서 좀 쉴게. 엄마도 쉬어요"

늘 편안한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짧은 시간만 있어도 쉽게 피곤해지는 곳.

갑갑함과 함께 피로가 몰려와서 서둘러 집을 나왔다.


어느새 세진은 일본행 짐을 챙기고 있었다.

일본 유학을 결심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헤어컷을 하고 돌아온 어느날, 화장대 거울 속에 엄마의 표정이 있는 듯했다.

문득 겁이 났다.

'나도 엄마처럼 살게 될까'

엄마의 인생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엄마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남편을 탓하며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세진은 거실 옆 테이블에 앉아서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공부, 대학원, 심리학, 고령화사회의 심리학, 한국, 일본

혼자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에는 일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자,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꼭 세진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지원 자격과 조건이 잘 맞았다.

준비 파일이 하나씩 늘어날수록 일본 유학행은 구체화되었다.

일본. doc

나고야대학_노년심리. doc

학교 주변. doc

지원서 final2.doc


파일명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마음은 차분해졌다.

세진은 문득 엄마가 김장재료를 정리해 놓던 순서를 떠올렸다.

피식 웃음이 났다.

'이 집안 여자들은 불안을 정리정돈으로 견디는구나'


물론 지원서와는 별개로 남편과의 대화와 논쟁은 길고 힘겨웠다.

스무 해를 넘게 사는 동안 남편과 이토록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번 유학을 준비하며 느꼈다.

남편은 만에 하나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될 경우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었고, 세진은 같은 공간을 점유하며 지금보다 더 증오하게 될 서로가 두려웠다.

숨 쉴 시간을 서로 갖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고, 여유 있는 사람이 여행을 올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이 서로에게 더 신선하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그녀가 그녀를 위한 선택을 했다는 사실에 반대를 할 수 있는 이유는 누구도 제기할 수가 없었다.


'잘 할 수 있을까'

그녀는 마흔 중반이 넘어서야 태어나서 홀로 본인만을 위한 결심을 해보는 듯하다.

이번이 처음이니 실수해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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