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화 이방인

타테마에의 벽

by 소설

낯선 곳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일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도착한 일본 기숙사 방은 좁고 서늘했다.
침대와 책상, 창문 하나가 전부였다.
그날 밤, 한국에 있는 남편과 아이들과 영상통화를 하며 주방 크기도, 바닥 면적도 딱 원하던 곳이라고 말했다.
말을 하고 나서야 그 말이 누군가를 안심시키기 위한 문장이라는 걸 알았다.

사흘이 지난 아침, 방은 더 작게 느껴졌고 침대는 좁았다.

서늘함이 몸 안쪽까지 스며들었다.


주변 모든 것이 새로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이었다.

학기가 시작되면서 새로운 환경의 신선함이 차츰 줄어들면서 심리학 용어들이 머릿속으로 쏟아졌다.

분명히 공부하고 온 단어인데도 뜻이 느낌이 달랐다. 한국에서 해석본과 함께 공부했을 때와 미묘한 의미의 차이가 느껴졌다.

'이걸 좀 제대로 공부했어야 했는데' 생각하는 중 수업과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단어 하나를 붙잡고 있으면 다음 문장이 이미 멀어져 있었다.
이해하지 못해도 손을 들지 못했고, 질문은 늘 머릿속에서만 맴돌다 사라졌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다는 생각이 한국과는 다르게 오히려 그녀를 더 경직시켰다. 더 창피했다.

그나마 쉬는 시간 중 K-드라마나 K-pop 이야기를 할 때는 참 다행이다 싶다.

어린 여학생들은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가져주었다.

눈빛이라는 게 참 무섭다.

다정한 마음으로 바라볼 땐 한없이 여유롭게 기다려 줄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불편한 듯한 눈빛이 보인다.

누구나 세진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지만 속마음은 보여주지 않는 느낌이 든다.

명분이라는 타테마에가 중요한 민족이라는 말이 이거였나 보다.

그들의 깍듯한 예의 바른 미소는 곧 허공 중에 사라진다.

외국인인 세진과 그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은 높아 보였다.

외국어의 압박은 세진을 점점 소심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이럴 예상을 못하고 유학을 결심했다는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정해진 루틴에서 벗어나 예상과 다른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워졌다.
설명할 자신도, 이해할 자신도 없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를 때가 많았다.


석 달 후 중간고사를 치른 날, 그녀는 학교 앞 라멘집으로 갔다.
문을 열고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쇼유라멘을 주문하고 기다렸다.

어린 학생들이 우르르 들어왔다가 웃고 떠들며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세진은 테이블에 혼자 남아 김이 오르는 그릇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라멘의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면발이 탱글 한 지 굵기가 적당한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국물이 뜨겁지도, 짜지도 않았다.

빨리 먹고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괜히 서글펐다.

기숙사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 방향이 어지러웠다. 좌표를 잃었다.

세진은 한국에서 동네 이사 한 번에도 며칠을 앓던 사람이었다.
그런 자신이 무모한 결정을 했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
누구와 한마디 대화도 하지 않은 그날,

'여기서는 내가 죽어 나가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생각이 스친다.

혼자구나. 철저하게 혼자였다.

외로움처럼, 그러나 외로움보다 '혼자'라는 단어가 단단하게 가슴에 박혔다.


이상하게도 그 상태에 적응하는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집중하는 시간이 가져오는 강렬함이 있었다.

세진은 매번 사전을 찾던 손을 멈추고 이해하지 못한 문장을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뜻을 모르는 단어들이 남아 있었지만 문장은 끊기지 않았다.

완벽하지 않아도 중단하지 않는 시간이 쌓였다.

세진은 본인도 잊고 지내던 조용하고 강인한 내면의 힘이 느껴졌다.

에너지가 원래부터 홀로였던 것처럼 조용히 방향을 바꿨다.

이 모든 것이 오로지 본인만을 위한 노력이라는 사실, 그 사실이 그녀를 응원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증명할 필요도, 설명할 이유도 없었다.

순수한 나를 다시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시간이었다.

열정과 자유와 몰입이 이렇게 한 방향으로 모인 적이 있었나 싶었다.

공부에 몰두해 본 적이 언제였나, 예전에 잠깐 알던 나를 다시 만나는 기분이었다.

세진은 혼자였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연구실 어드바이저의 말이 귀에 익고 심리학 용어들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던 때,
아침 일찍 전화가 울렸다. 여동생이었다.

“엄마가 쓰러지셨어.”

왜 항상 이런 일은 이 타이밍에 일어나는 걸까. 목구멍이 막혔다.

여동생은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고 가능하면 한국으로 올 수 있겠냐고 물었다.
세진은 대답 대신 가장 빠른 비행기를 검색했다.

공항 대합실에서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며 문득 생각했다.

'나는 평생 혼자일 수 없을까.'
일주일 전에 기말고사를 준비를 일찍부터 해야겠다며 책상에 앉았을 때, 온 가족을 잊고 지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걸까 잠깐 죄책감을 가졌었다.

그 질문은 곧 우스워졌다.

또 나냐고. 오빠는? 동생은?

그때의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한국행 비행기 탑승 안내 방송이 나왔다.

탑승구를 향해 걸어가며 부드러운 팬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세진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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