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화 돌아오다

손끝의 기억

by 소설

뇌출혈로 쓰러진 엄마는 온몸에 여러 개의 튜브를 연결한 채 병원 침대에 누워계셨다.

누워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니 마음 밖으로 튀어나오던 불평이 말없이 가라앉았다.

침대에 기대어 누워있는 엄마는 너무 작아 보였다.

늘 집안을 가득 채우던 사람이 침대 하나에 겨우 몸을 얹고 있었다.

침대 옆에 앉아 있던 동생이 얼른 일어나 세진의 손을 잡았다.

"언니, 어서 와. 비행기표가 빠른 게 있었어? "

"수고했지? 수현아. 이게 무슨 일이니?"

"세지.. 이야?"

엄마는 눈을 반짝이며 안간힘을 쓰며 겨우 어눌하게 이름을 발음했다.

반가워하는 눈빛이었지만, 세진은 엄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엄마의 반색하는 표정과 느린 말투가 어색하기 그지없다.

세진에게 엄마는 항상 강하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심각한 얼굴로 꼬박꼬박 나를 평가하던 그 사람이 저렇게 평온한 표정을 하고 누워있다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딸의 기말고사가 코앞이라며 수현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잠시 집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금세 병실 문이 닫혔다.

혼자 남은 병실은 기계음과 숨소리만 남았다.


몇 달 전 김장을 담그며 쾌활하게 웃던 엄마의 손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따뜻한 물수건으로 엄마의 목과 얼굴을 닦고, 아카시아 향이 나는 구강세정제를 거즈에 묻혀 엄마의 이를 닦아냈다.

'동구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로 시작하는 노래가 떠올랐다. 아카시아 덩굴이 흐드러지게 핀 공원 길가를 걸으며 콧노래를 부르던 어느 봄날의 엄마 모습이 겹쳐졌다.

어릴 적 감기에 걸려 누워있던 밤도 떠올랐다.

엄마는 말없이 수건에 따뜻한 물을 적셔와 내 손과 얼굴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엄마의 체온과 손길이 구석구석 닿으며 기분이 말끔해지는 기억,

엄마는 손 끝으로 마음을 전달하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벼워서 금방 휘발되는 말보다는 행동을 택한 사람.

엄마의 눈은 분명 내가 알고 있는 눈동자였다. 그런데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끈적하고 강한 감정을 품은 눈빛을 나는 처음 마주하고 있었다.

'이 눈은 아마 나와 제일 가까운 눈빛이었을 텐데, 이토록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을까'

엄마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와 눈동자를 덮는다.

"엄마, 피곤하신가 봐요. 눈 좀 붙이세요"


따뜻한 병실을 빠져나와 차가운 바람을 맞는다.

찬 공기가 폐 속까지 깊이 차오르도록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병원 옆 마트에 들러 달콤한 향기를 머금은 딸기를 한팩 샀다.

엄마가 딸기를 좋아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싫어할리는 없었다.

세진이 아플 때마다 엄마는 늘 기운이 날만 새로운 과일을 사주셨으니까.

옛 기억을 계속 불러와서 과거로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수업이 계속되고 있겠지.

강의가 끝난 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길을 걸어 나와 우두커니 앉아있곤 하던 학교 앞 벤치가 떠올랐다.

학교 시계탑과 건물 전경이 이상하리 만치 선명하게 눈앞에 펼쳐지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바로 어제 그 자리에 앉아있었는데, 지금은 병원 앞 벤치에 앉아있다.

너무 급작스러운 이동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시야가 아득해지며 가빠졌다. 호흡을 다시 한번 달래 본다.

이런 복잡한 마음은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랜만에 친정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나 한국이야. 살아는 있는 거지?"

"그래, 저녁에 갈게. 우리가 간병인을 구해야 하는 거지?"

"아버지 암병동에 계실 때, 2개월 만에 돌아가셨잖아. 시간이 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다고 무턱대고 직장을 그만둘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그래, 어렵지. 나 그만 들어가 볼게"

전화를 끊고 세진은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었다.


병실로 돌아오니 엄마의 손이 조금 움직이고 있었다.

의식 없는 반사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세진이 급히 다가가 그 손을 감싸 쥐었다.

"엄마, 나 여기 있어."

그 말은 엄마에게 하는 말이면서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세진은 엄마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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