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이해하기까지
"해외유학휴직에서 가족 돌봄 휴직으로 변경할 수 있을까요?"
"네, 선생님 그러면 유학휴직 중단 신청을 먼저 하고 복직처리가 되면 돌봄 휴직 신청이 가능하세요."
행정 담당 선생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준비해야 할 서류의 리스트가 한참 동안 나열된다.
엄마의 옆에 머무르기로 결정한 마음보다 더 복잡한 서류 작업이 남아 있었다.
잘 해낼 수 있을까,
내가 무너지지 않을까,
세진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뒤엉켜 굴러가고 있지만,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동시에 간병으로 힘들어하던 지인 분들의 전해 들은 이야기도 가슴을 무겁게 눌렀다.
하지만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라는 걸 안다.
낮잠 든 엄마의 옆에 앉아서 일본어로 된 책을 읽었다.
무심결에 소리를 내어 발음해 본다.
"듣기.. 좋다"
"일본어가?"
"네... 목소리"
"왜 아직 외국어에 끌리는지 잘 모르겠어. 일상에서 살짝 벗어난 느낌이 들어서 그럴까? 일상은 너무 지겨우니까?"
"멋있어... 항상... 그랬어"
엄마의 칭찬에 기분이 머쓱해졌다.
내가 엄마의 보호자라는 걸 염두에 두고 나를 붙잡으려고 하시는 말일까,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마음이 살짝 포근해졌다.
사랑받는 딸의 역할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날 밤, 세진은 일본의 강의실을 처음으로 떠올리지 않았다.
독서동아리 언니가 오후시간에 병원에 잠시 들르기로 했다.
슬리퍼를 끌고 내려가보니 언니가 따뜻한 커피와 함께 촉촉한 눈빛을 건넨다.
"속상했겠다, 자기. 본인 몸부터 챙기는 게 우선이야, 알지?"
종이가방에 한가득 챙겨 온 비타민과 책들을 하나씩 꺼내며 설명을 하나하나 덧붙인다.
"이건 읽다 말아도 돼, 이것도 내가 좋아서 가져왔어. 다 읽으면 연락 줘. 내가 회수해 갈게"
"언니 고맙다, 너무. 커피가 반가워. 언니는 더 반갑고"
시아버지 간병을 3년 동안 했다는 언니는 내 손을 단단히 쥐고 온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큰 결심한 거 알아. 나한텐 부담 갖지 말고 연락해"
꽁꽁 싸여있던 마음이 느슨해지면 숨을 쉬는 기분이 들었다.
소중한 사람을 얻었다.
작은 화분을 책상 위에 올려두니 공간에 한결 생기가 돈다.
"엄마, 동네 극장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화 같이 보러 간 거 기억나요?"
"어.."
"어릴 때는 뭔지 모르고 따라갔었는데 지나고 나서 한 번씩 그때가 떠오르더라. 그 영화가 진짜 보고 싶었나 봐. 그러는 적이 없었잖아. 젊었을 때 봤던 영화예요?"
"어, 아가.. 씨때"
고개를 살짝 숙이며 수줍어하는 엄마의 표정을 보고 세진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랬구나."
'엄마도 아가씨 때가 있었겠구나, 왜 그 당연한 걸 몰랐을까'
아가씨 시절의 엄마는 비비안 리처럼 매혹적이고 당돌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진이 알던 굳은 얼굴보다, 훨씬 가볍고 순수한 표정으로 영화를 보던 사람.
처음으로 생각했다.
세진이 모르던 엄마의 젊은 시절이라는 게, 친구도 없이 그 긴 시간을 어떻게 견뎌왔을까,
엄마의 청춘이 떠오를 때면 밀려오는 그리움과 허전함을 어떻게 혼자 감당해 냈을까,
엄마는 생각보다 단단한 사람이었다.
엄마의 손을 다시 한번 잡았다.
나는 그 유전자를 이어받아서 현재를 버티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엄마와 함께 이 계절을 보내고 나면 나는 더 단단해질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엄마와의 연결 속에서 나를 잃는 게 아니라 가장 깊은 곳의 나를 만나는 일이라는 걸 조금 알 것 같다.
세진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 계절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연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