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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홍 Apr 29. 2022

회사에서 쓴다

8년 차 카피라이터의 씀씀이

졸릴 때도 쓴다



 세상에서 가장 졸릴 때가 언젠지 아는가. 바로 점심을 먹은 직후다.

오늘처럼 업무가 없는 날이면 말해 뭐해. 닦달하던 광고주도, 재촉하던 기획들도 웬일로 조용하다.

모니터 한구석, 시계는 정확히 오후 두 시를 가리키고 있다.

눈꺼풀이 무겁지는 않은데, 정신은 육수에 빠진 면발처럼 서서히 풀어헤쳐지는 중.

 오늘 점심 메뉴는 평양냉면이었다.

 



삼십 대는 쓰다



 카피라이터로 살아온 지 어느덧 8년째에 접어들었다. 8년이라니.

하기 싫은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하고, 재미가 없으면 쉽게 흥미를 잃어버리는 내가, 한 가지 행위를 10년 가까이 지속하다니. 이것은 기적이다. 어디선가 봤던 짤방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친다.

'이것은 내가 일으킬 수 있는.. 아주 작은.. 기적.'

밍기적.

 내가 끄적끄적과 밍기적을 오가는 사이, 친구들은 결혼을 했고 몇 명은 엄마가 되었다.

나는 서른하나가 되었다. 이제 만 나이가 통용된다고 하니 서른.

 그냥 어른. 멋없다.

 십 대 때부터 학수고대해왔던 삼십 대인데, 이렇게 멋없을 줄이야. 갑자기 잠이 확 깬다.


 서른 살이 되면, 소위 '존멋'일 줄 알았다.

 서울 한 복판에 서른 평 정도 되는 아파트도 한 채 있고, 내 명의로 된 차도 한 대 있고. 출근할 때는 딱 달라붙는 H 라인 스커트에 최소 8cm 굽은 되는 지미추 힐을 신고.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것들.

 내가 꿈꿨던 서른 살의 내면은 또 어떤가. 어떠한 극한 상황에서도, 누가 무슨 말로 자극해도 결코 당황하거나 쉽게 흥분하지 않는 여유로움. 부처에 버금가는 인자함과 인내심을 겸비한, 완성된 인격체가 절로 되는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지만, 십 대 때 내가 그렸던 나의 서른 살은 그토록 거창했다.


 현실은 어제 감고 나서 그대로 잠들어버려 부스스하게 갈라진 머리와 초록색 글씨로 SPORTS가 대문짝만 하게 적힌 맨투맨 티, '한 번만 빨고 버려야지' 했지만 세탁 후 '한 번만 더 입을까' 해서 걸치고 나온 청바지와 최대한 발이 편안한 나이키 운동화 차림이다. 게다가 집은 고사하고 내가 가진 차라고는 홍차, 녹차가 전부다.

 말하고 보니 떫다. 한술 더 떠볼까. 나 무면허다.




인생 별거 없, 씀



 운전도 무면허. 인생도 무면허인 내가 카피라이터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밥 벌어먹고 사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글 끄적이는 것 밖에 없는 내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이토록 생산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니. 지금 당장 회사 밖으로 뛰쳐나가 하늘을 향해 할렐루야를 외치고 싶다. (무교다.)

 물론 카피라이터로 살아가기 때문에 뒤따라오는 문제도 늘 산재하지만, 적어도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행복하다. 날 좋은 날, 좋아해 마지않는 평냉을 한 사발 들이켠 덕일까. 일이 잠잠해서일까.

아무래도 후자일 가능성이 커 보이지만, 아무렴 어때.

 내일은 금요일이고, 무려 세 시에 퇴근하는 날에다(아마도), 밀린 잠을 잘 수 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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