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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Nov 02. 2022

이 불안한 밤이 든든해지는 이야기



간밤에 일어난 믿지 못할 사건을 뉴스에서 듣고 인생의 허무함에 다시 한번 몸서리치는 날이었다. 결코 어떤 죽음도 예상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실로 죽음에 이르는 어떤  앞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면 우리는 과연  삶을 어떻게 이해하며 살아낼  있을까.


몇 달째 잠을 쉬이 들 수 없다. 잠자기 전 루틴처럼 켜는 유튜브가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실체 없는 어떤 불안감이 늘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 모양새여서 꽤 오래전부터 막연한 불안과 허무가 어디서부터 기인하는지 골몰해 왔다. 가장 먼저 의심한 곳은 직장. 일이다. 이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당장 내일 뭘 해야 하는지 머리를 굴리면서 '하기 싫다'의 마음과 '하는 게 무섭다'란 생각이 동시에 든다.


휴가 중에도 꿈에 직장이 나올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었고, 늘 하던 데일리 업무가 슬슬 버겁게 느껴지는 때가 잦아서 이상하다고 느낀 날들이 많았다. 그동안 묵묵히 성실하게 잘 해왔던 일이었는데 왜 이렇게 무서워진 걸까. 성과에 대한 욕심이 지나치지도 않았고, 팀장의 결재 방식은 그 전과 크게 다를 게 없는데. 물론 연차에서 오는 좀 더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살짝 있었고 그동안 나 혼자 잘났다고 여겨 온 업무에서 다른 팀원의 눈에 띄는 성장을 목도한 일이 있어서 그때 느낀 강렬한 질투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만 해본다.


일이란 참 오묘해서 분명 내 삶을 갉아먹지 않을 정도로만 하고 싶은데 뒤돌아보면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해서 회사의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한다. 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몇 번쯤은 조직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하는 조용한 퇴직자에게도 일로서 갖는 성취감은 나의 성장을 의심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일'이다. 그 때문에 '일'은 인생의 중요한 위치에 있다.



여하튼 정확히 찾을 수 없는 나의 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열심히 문장을 수집하는 거였다. 술로 감정을 풀 수도 없고 친구와 나누는 이야기에도 한계는 있었다. 나도 모르는 이 안개 같은 모호한 마음을 언어로 표현할 줄 몰라 그것을 대체해 줄 여러 책을 찾아 읽고 또 읽었다. 어떤 날은 이디스 워튼의 《환락의 집》 문장을 뒤졌고 또 어떤 날은 김민철의 《내 일로 건너가는 법》에서, 다음 날엔 서점에서 운영하는 사이트에 올려둔 작가들의 인터뷰 글을 탐독하며 불안한 밤을 든든한 요새로 바꾸기 위해 발버둥 쳤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막연하게 느끼는 이 불안한 감정을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어떤 단단한 것 그리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언어로 분명하게 맞닥뜨리는 일이었다. 스모그처럼 서서히 그리고 멀리 퍼지는 이 감정을 아무리 손으로 감싸도 아주 쉽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고 애초에 그 연기를 바구니 안에 담는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불안하고 초조한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 없어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단이 절실했다. 그것이 언어이든 그림이든 행위이든 모든 것들이 필요했고 나는 저축하듯 한 문장씩 마음에 남기는 낮과 밤을 보냈다. 여전히 내 주변에 있는 불안과 걱정은 멀어지지 않았지만 최근에 본 글귀와 영상에서 조금씩 불안의 실체를 더듬더듬 다듬어 보고 있다.




채널예스 허지웅 인터뷰 중

일단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실제보다 더 불행하게 보지 않고, 또 실제보다 더 희망적이게 볼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를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게 중요했어요. 이 능력이 저는 '평안'이라고 생각하는데..


절실한 신자라고 보기 어렵지만 늘 되뇌는 기도문 중 하나는 '평온한 상황을 바라'기 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도 평온할 수 있는 마음'을 바란다는 말이다. 예전에는 무조건 나의 주변 환경이 내가 바라는 대로 세팅되고 이뤄지길 기도했다. 원하는 곳에 취업을 하고 내 능력보다 더 많은 연봉을 벌고 그 안에서 커리어도 탄탄하게 쌓는 이상형을 꿈꾸기에 바빴다.


하지만 세상을 살면서 깨달은 건 기도의 방향이 아예 잘못됐다는 거였다. 그런 환경이 백 프로 완벽하게 이뤄질 수도 없을뿐더러 설사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의심이 많았기 때문에 온전히 그 상황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거다. 그래서 평안은 환경이 아니고 내 마음에 꽉 붙들려 있어야만 했다. 물결치는 배 안에서 심하게 몸이 요동쳐도 마음이 평온하면 집채만 한 파도도 무력한 것처럼.

뿌연 안개같이 떠있는 ‘평온’이란 단어를 허지웅 작가의 인터뷰에서 구체적으로 만질 수 있었다.


내가 느끼고 있는 불안을 더 불행하게 혹은 더 낙관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내 맘대로 짐작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직시하는 하는데서, 즉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을 제대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불안의 실체를 눈으로 본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

진정 이 말이 나를 구원했고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 인터뷰를 읽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 자체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맞았다. 예전보다 못한 나의 업무 성과를 인정하지 못했고 옆 동료의 커리어 성장을 정직하게 받아들이지 못해서 왔던 불안함. 이 사실에서 우리는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아닌 함께 일하는 팀 부서원인데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음을 고백해야겠다. 그리고 집안 행사를 앞두고 큰며느리로서 해야 할 도리를 못하겠다며 제쳐둔 마음도 슬며시 꺼내왔다. 맏며느리 역할을 잘 해내고 싶은 마음과 돈을 쓸 수 없는 가난한 마음 사이에서 많은 감정이 일었고 그 어느 쪽 편도 들지 못한 채 시간만 보냈음을. 일단 이 세 가지의 사실을 재차 확인하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불안했던 밤이 잠시 수그러들었다. 한 발짝 더 근본을 헤쳐봐야 하지만 아직은 때가 이르다. 지금은 나의 불안을 손에 꼭 쥐고 수시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알고 있는 문제야'

잘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적어도 뭘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볼 수는 있다는 이 사실만  알고 있어도 두근거리던 가슴이 잠시 평온해진다.



최근 트위터에서 본 영상이 꽤 기억에 남았다.

예술가 요안 부르주아의 공연인데 성공은 선형이 아니라는 주제로 계단을 올라가다가 밑으로 떨어지면 트램펄린이 다시 그를 올려주는 퍼포먼스다. 누군가가 트윗으로 '사회에서 성공한 이유는 그들을 받쳐준 사회적 안전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말을 남겨 놓았는데 진심으로 이해가 됐다. 우리는 혼자 잘 살고 싶어 하는 이기심을 가지고 있지만 절대 혼자서 성공할 수 없고, 만약 그런 사람이 있어도 결코 행복하지 못한 걸 알고 있다.(분명 알고 있는데 혼자만 잘 살고 싶은 마음은 왜 없어지지 않는지..)

진심으로 나의 성공을 축하해주고 다 함께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옆 사람이 없다면.

그건 그것대로 무척 쓸쓸하겠지.


이번에 개인적으로 회사에서 상을 받게 되었다. 뭐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었는데 정말 팀원 모두 한 마음으로 축하해주고 바쁜 업무 시간을 쪼개 플래카드까지 만들어 주는 모습에 스스로 반성을 많이 했다. 만약 나였다면 그렇게까지 축하해 줄 수 있었을까. 내심 그의 노력을 깎아내리기 바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매일 팀원들에게 도움을 받고 살고 있으면서 왜 나만 잘나고 내 일만 힘들다고 투덜댔는지 모르겠다. 우리 모두 진심으로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가 잘 되길 바라며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인데 말이다. 이제야 나는 옆자리의 우리 부서원들의 진심을 왜곡하지 않고 똑바로 보기 시작했고 우리가 함께여서 안전하고 괜찮다는 감각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믿음은 부부, 가족, 친구 사이에서도 꼭 필요하다. 내 실수를 감싸주거나 혹은 따끔하게 알려주는 일에서 우리는 상대의 트램펄린이 되어 서로 튕겨 올라가라고 받쳐주며 언제라도 계단에서 추락해도 괜찮다고 믿는다. 그런 믿음이, 그 괜찮음이 불안한 나의 밤 한쪽에 꼭 필요한 일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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