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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Mar 27. 2023

퇴사 대신 휴가 내고 1000만 원 유럽여행 갑니다

런던을 4박 5일 간다고요?



"우리 회사 그만 두면 해외 한 달 살기하고 오자."

"좋지! 어디로 갈까? 크로아티아? 그리스?"


1년에 몇 번씩 위와 같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곧 이곳을 떠날 생각에 남편과 나는 마음이 부풀었다. 매일 보는 사무실 사람들, 반복되는 업무, 끊임없는 업체 전화를 다 끝내버리고 홀가분하게 다른 나라로 떠나는 우리의 모습을 상상하며 다음날의 밥벌이를 꾸역꾸역 이어나갔던 날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리고 또 그날을 기다려도 점점 꿈에 부풀어 오르던 희망이 점점 현실에 잠복되었다. 물가는 계속 오르고 내 월급은 그대로인데 난방비에 보험비, 부모님의 건강보험비까지 어느 것 하나 실제로 커트시키지 못했고 우리의 퇴사 용기도 점점 줄어들어갔다. 그러니까 해외 한 달 살기는 언젠가는 오겠지만 그 언젠가가 내 나이 60일 수도 있고, 75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영영 오지 못하는 날일 수도 있었다.


"우리 생각을 바꾸자. 이러다간 영영 못 떠나겠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젊을 때 단 하루라도 다녀오자."

"그럴까? 우리 앞으로 몇 년간은 회사에 바짝 붙어 있어야겠지?"

"응, 최대한 붙어 있어 봐야지."


그렇게 우리는 지난 2월 의기투합을 했고 갑자기 여행지를 고르기 시작했으며 내 의견에 따라 런던을 가기로 했다. 처음에는 6월쯤 떠나려 했지만 친구의 결혼, 회사 행사, 부모님 생신 등의 일정을 조율하느라 이왕 가는 거 4월에 가기로 하고 떠나기 한 달 전 항공권을 끊고 숙소를 예약했다.


"진짜 가는구나."


갑자기 일주일 휴가를 내고 떠나는 여행이어서 얼떨떨했다. 그제야 허리디스크 때문에 15시간을 앉아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들었고 이 비행기표가 싼 지 뭔지 감을 잡을 수도 없었다. '원래 이렇게 비쌌나? 아님 비행기표값도 올랐나?' 뒤늦게 검색해 보니 유류세가 많이 올라 10년 전 런던행 왕복표를 90만 원 정도에 샀던 걸 지금은 200만 원 가까이 주고 사야 했다. 우리 부부의 항공권만으로 400만 원이 들었다.

아, 이래서 장거리 여행은 미리미리 계획해야 하는 거구나. 우리는 갑자기 가게 되는 바람에 어느 정도의 지불은 감수했으며, 숙소마저도 뒤늦게 예약하는 바람에 처음에 본 가격보다 30만 원이나 더 줘야 했다.(미친다 미춰...)


설레고 즐거워야 할 여행에 돈이 덥석 덥석 들어가니 점점 무서워졌다. 이렇게 가도 되는 건지, 우리가 너무 사치하는 건 아닌지, 지금 시기가 이런데 뭘 얼마나 놀겠다고 이런 짓을 하는 건지 등등 오만가지 생각이 들면서 15시간을 앉아서 가는 건 허리를 박살 내는 것과 같다는 결론으로 항공사 어플을 계속 들락날락하다가 덜컥 편도 비즈니스표를 사버렸다.


????


읽는 여러분들도 놀라셨겠지만 나도 놀랐다. 하지만 100만 원만 더 쓰면 올 때는 이코노미일지라도 런던으로 갈 때는 누워서 갈 수 있으니 짧은 여행의 컨디션도 챙기고 아플 허리도 챙길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으면서 행여 그나마 싼 좌석 없어질까 노심초사 이체한도를 올려가며 결제를 한 것이다.


허리 때문에 런던을 포기할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차에 감사하게도 정말 가고 싶은 여행을 취소하지 않고 떠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럼 이제 항공권만 600이다. 숙소와 식비, 교통비, 자잘한 경비들을 보태면 4박 5일 여행에 1000만 원 가까이 쓰게 된다. 여행 갈 때 보태려고 월급에서 10만 원씩 떼어 5년을 모아도 다 채워지지 않는 우리의 여행 비용. 즐겁게 떠나려고 시작한 일인데 자꾸 마음이 무거워지고 연신 뉴스에서 실업률과 물가상승, 해외은행 파산 소식까지 들려와 우울했다. '정말 우리가 가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나지 않았다. 자격까지 운운할 건 아니지만 열심히 모은 돈을 이렇게 한방에 써도 될 만큼 열심히 살아온 게 맞는지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즈니스 클래스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어서 이런 이벤트가 우리 형편에 가당키나 한 것인가 불안하기만 했다.


소심러답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은 여행에 관련한 검색에 탐독하도록 만들었고 차츰차츰 여행이 주는 진정한 의미를 찾기에 이르렀다.(이런 걸 합리화라고도 한다지..)


항공권과 숙소를 예약하느라 돈만 써서 안일한 시각으로 여행을 바라본 자체가 잘못되었다. 애초에 우리가 왜 떠나고 싶었는지, 그 시기가 지금이어야만 했는지 들여다봐야 했다.


남편도 나도 직장에 지쳐있던 참이었다. 그는 전화 진동벨 소리만 울려도 가슴이 쿵쾅거리고 모든 사람들이 미친 듯이 싫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반복되는 업무와 늘 만나는 회사 사람들과의 관계와 대화가 답답했다. 뻔한 얘기와 별로 궁금하지 않은 생활을 묻고 대답하노라면 차라리 책상에 앉아 혼자 오래도록 일만 하는 게 편한 상태에 이르렀으며 집과 회사의 이동경로 반복, 중간에 들르는 운동과 아주 가끔씩 만나는 친구들의 모임은 어느새 고정적인 패턴이 되어 내 삶에 붙어 있는 찐득한 벽지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매일 하는 생각과 계획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이대로 머물길 바랐고 인생에서 오늘의 나는 가장 젊고 생기 있는 사람인데 감각이 무뎌지고 모든 일에 시큰둥한 반응으로 점점 안으로만 숨으려고 하는 내가 보였다.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스스로 선언하면서 관절과 뼈가 가장 건강하고 그나마 이런 허리라도 유지할 수 있을 때에 떠나기로 했다. 빠르게 현실로 복귀해야 하지만 4박 5일이란 시간에 제한을 두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해보고 싶은 것 해보고, 느끼고 싶은 것 느끼고, 새로운 자극과 인사이트를 찾아 우리는 떠난다. 고작 일주일도 안 되는 여행기간에 뭘 보고 느끼고 올 거냐는 묻는 친구의 말에 마음이 잠시 흔들리긴 했지만 나의 세계가 점점 작은 행성이 되어 가는 걸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같은 책을 읽어도 런던에서 읽고, 매일 듣는 음악도 프림로즈힐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들으면 분명 다를 테니까.


한 단어로 모든 감정을 대체하며 살았던 이곳을 살짝 벗어나면 그동안 잊혔던 감정의 말들이 낯선 풍경과 함께 떠오를 것이다. 가능한 무심한 마음으로 하루를 버티려 했던 시간을 비켜나 모든 것에 마음을 두고 작은 일에 감탄하며 생경한 장면과 감정을 쓸어 담아 오고 싶다. 이런 시간이 너무 절실하다. 나에겐 이런 것들이 인사이트고 편협한 사고를 넓히는 과정이며 앞으로 삶을 살아내는데 유용한 경험일 것으로 믿는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원지의 하루>라는 유튜브를 보았다. 원지 유튜버가 미국으로 가는 퍼스트클래스를 400만 원 주고 끊는 편에서 했던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소득 수준 이상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도 중요하고 그 이하의 세계를 아는 것도 중요해요.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을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은 굉장히 다르죠. 경험을 돈 주고 사는 일에서 디테일의 세계를 알 수 있는 거예요.


이 멋진 말이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불안했던 내 마음을 다독여주는 큰 힘이 됐다는 걸 원지님은 모르겠지만 이런 굉장한 위로를 할 수 있는 건 그녀가 수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경험하고 이해하며 얻은 지혜가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보고 듣는 게 많을수록 생각하는 범위가 넓어지고 이는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연결되어 결국 자신의 삶을 더 깊고 지혜롭게 만들 것이다.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는 과정에서 언어는 섬세한 감각으로 사고를 넓힐 수 있는 나만의 자산이다. 나는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그동안 쓰지 않았던 말들을 많이 주웠다. 평소에는 느낄 수도 없고 감히 상상도 하지 않았던 여러 감정들이 저절로 언어를 만들어냈는데 이를테면 나의 생활을 행성에 비유하는 문장과 밥벌이의 지겨움을 넋 놓고 바라보지 않겠단 다짐의 말 같은 것. 그리고 용기에 대해 내린 새로운 정의다.


퇴사만이 지금 내 삶을 변화시킬 하나의 정답이라고 믿었다. 퇴사를 하는 것만이 용기라고, 아직 용기가 부족할 뿐이라고.


하지만 퇴사대신 4박 5일 런던 휴가를 계획하는 것도 용기라는 걸 이제 알아차렸다. 남들이 뭐라 하든 우리의 희망을 퇴사에 두지 않고 형편대로 다른 길로 떠나보는 것. 우리 삶의 각도가 조금은 넓어지기를 바라면서 용기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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