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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Jul 10. 2023

경험한 사람들의 말엔 '딴딴함'이 있어요


요즘 부쩍, 내가 어떤 말을 하고 또 무슨 글을 쓰고 있나 생각한다. 분명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고, 내 머리에서 쓰인 문장인데 내 것 같지 않은 느낌이 자주 들기 때문이다. 단지 어디서 들은 말로 내 감정을 대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마치 내가 느끼고 해 본 것처럼 부풀어 말하고 있지 않은가에 흠칫 놀라는 일이 많아졌다.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건 쉽다. 하지만 나의 말을 하고 나의 글을 쓰는 일은 늘 어렵다.


분명 내 속에 많은 일들이 있음에도 이 가지들을 잘라 정돈하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런데 마치 잘 다려진 옷을 입는 것마냥 스스로 납득되지 않는 생각과 감정들을 나의 것으로 소화하고 상대에게 던져버리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그런 과정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감정을 나누지만 내가 진짜 나인지 헷갈린다.


이 모습에서 빈 껍데기를 느끼는 건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어낸 감정을 지나치게 극대화시키고 솔직하지 못한 생각을 독특함으로 바꿔버리는 못된 습성을. 그래서 나의 말엔 단단한 무엇이 없고 허공의 메아리처럼 공허하게 들릴 뿐이고 아무리 글을 지어도 아름다운 향기가 나지 않는다.


경험. 그래서 경험이 중요하다.

경험해 본 사람들의 말엔 단단한 걸 넘어서 딴딴한 게 들어 있다.


직접 보고 관찰해 얻은 사람일수록 상상력 또한 구체적이고 실제감이 우월하다. 반면 아무것도 모르고 짐작하여 상상하는 사람의 말과 글은 씨앗 없는 열매를 땅 속에 묻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말하는 사람은 몰라도 듣는 사람은 분명히 느낄 수 있고 쓰는 사람은 몰라도 읽는 사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아, 이 사람이 진짜 해본 거구나. 찐이구나.”


그 차이를 나타내는 포인트는 정말 별 것 없는 데서 온다. 우리가 다 아는 말, 쓰고 있는 단어인데 내가 하는 거랑 진짜 경험해 본 사람이 하는 것과 다른 이유는 같은 말을 해도 정말 해본 사람만이 묘사하는 분위기와 풍경은 사소한 데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진짜 힘들게 산에 올라가서 그 나무를 봤더니 글쎄. 너무 처량하고 외롭게 서있더라고.”


“몇 번 숨 고르고 올라가는데 굉장히 힘들었어. 바닥이 미끄러워서 다음엔 꼭 등산화를 신어야겠더라. 그래도 열심히 가서 그 나무를 봤더니 글쎄. 비가 와서 그런지 나뭇잎도 다 떨어져 있고 서있는 모양이 외로운 사람처럼 처량하지 뭐야.”


등산 다큐멘터리를 보고 말한다면 첫 번째처럼 묘사할 것이고, 직접 등산 가방을 메고 낮은 산이라도 타 본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 때문에 힘들었는지 한 마디라도 더 보탤 것이다. 자기가 느낀 모든 것을 정보화하여 옆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은 본능과 자연스레 그 풍경을 떠올리며 당시에 경험했던 고생을 공유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이렇듯 경험은 같은 장면에서 얼마나 더 많은 디테일을 갖고 있느냐의 차이고 경험이 직접적이고 다양하면 내가 실제로 겪지 않고 상상할 수 있는 폭도 깊어진다.


개인적으로 확실히 글을 쓸 때 경험 게이지가 높으면 모을 수 있는 단어가 많아진다는 점이다.  <넓다>라는 단어의 폭이 (마음이 넓다), (품이 넓다), (도시가 넓다)에서 머무르다 지독한 첫 이별을 겪고 난 뒤 '그가 없는 시간의 하루가 굉장히 넓다'는 걸 깨닫고 나서 (넓은) 의미가 단순히 면적을 뜻하는 것만이 아닌 시공간을 이루는 큰 세계였단 걸 몸으로 체득했다. 이 단어의 세계가 한 겹 더 펼쳐진 이후 그가 없는 넓은 하루에서 나는 한동안 외롭고 외롭게 있어야만 했고 그 경험은 내 단어로 남았다.



며칠 전 모임에 나갔다가 선배 오빠에게 띵언을 들었다.


아픈 언니를 돌보며 두 아이를 보살피는 가장이 된 선배 오빠는 매일 싸우는 언니와 지쳤는지 우리와 다 놀고 헤어지려는 무렵 어쩌다 나온 대화에서 "집에 들어가는 건 싫지만 해야 할 일이 있어 가는 것뿐"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아마 모처럼 우리와 만남에서 더 놀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혼자 있는 시간도 있었으면 하고 매일 치르는 일상의 전쟁에서 숨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 하지만 가야 한다고.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가야 한다고 농담처럼 말하는 오빠의 말 한마디가 갖는 무게를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에 야유를 보내는 대신 오빠를 이해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복잡한 인생의 희로애락을 단순한 말 한마디로 내뱉을 수 있다면.


말은 나의 삶과 연결되어 있고 직접 경험해 본 세계가 깊어지면 고유한 단어로 내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바라볼 수 있을지 모른다.


최근에 내 마음을 건드린 딴딴한 사람들의 말을 보태며 나의 세계를 더 넓고 깊게 확장하기 위해 노력해 보련다.




김연아의 말(프로그램 유퀴즈에서)

올림픽은 하늘이 정해주는 거다.
2등을 하든 3등을 하든 메달을 못 따든 세상이 무너질 만큼 큰 일은 아닐 거다.
처음부터 겁먹지 말자. 막상 가보면 아무것도 아닌 게 세상에는 참으로 많다.


수많은 도전과 실패 끝에 얻은 영광을 뒤로하고 무(無)의 세계에 당도한 그녀의 딴딴한 말.




윤종신(정재형 유튜브에서)

꿈이 뭐냐고요? 잘 소멸하는 거요.
나도 엄청난 개인주의자거든. 내가 너무 중요해.
뭘 모를 때가 기운이 더 좋아. 그리고 그 기운을 대중이 느껴.


직설적인 가사로 대중들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그의 딴딴한 말




김미경(홍진경 유튜브에서)

저희 어머니가 말씀하셨어요. 살다가 겁나거나 무서우면 일찍 일어나라고.


수많은 성공신화를 직접 보여주고 있는 그녀의 딴딴한 말




최화정(비밀보장 팟캐스트에서)

살면서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있더라. 피부, 표정, 그리고 반듯한 자세와 태도야.
누구나 나이 들면 그 얼굴이 그 얼굴. 결국 남는 건 자세와 태도인 것 같아.
그리고 예전에는 성실한단 말이 재능이 없다는 말 같아서 싫었는데 나이 들고 보니 성실한 게 최고더라.


나이와 라이프스타일은 별개임을 꾸준히 보여주고 있는 그녀의 증명된 딴딴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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