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공동체 - 경비원 해외여행 프로젝트
여는 이야기
아파트 경비는 정년퇴직 후 선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자리 중 하나다. 낮은 급여, 냉난방도 안 되는 비좁은 공간에서 꼬박 하루를 보낸다. 경비 업무 외에도 청소, 주차 관리, 민원 응대, 분리수거까지 아파트의 온갖 잡일을 도맡는다. 잊힐만하면 뉴스에 나오는 경비원 갑질 사건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뉴스 보도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며 대다수 경비원이 책 임계장 이야기처럼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한 채 살아간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그마저도 일자리를 잃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실상은 귀천이 존재하는 슬픈 현실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약자를 배려하고 더불어 사는 사회는 정말 꿈같은 이야기일까? 그래, 꿈같은 이야기라고 해두자. 그런 세상은 정말 꿈같은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말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어려울지 몰라도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실천한다면 어떨까? 내가 사는 아파트만이라도 주민들이 경비원을 배려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그것도 아니면 우리 가족만이라도 실천해 보면 어떨까?
오늘 소개할 이야기는 이런 마음으로 시작한 아파트공동체 이야기다. 주민들이 경비원을 배려하고 함께 사는 아파트를 만들기 위해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 아침마다 주민들에게 멋있게 경례로 인사하는 경비원이 있다. 아이들이 길을 건널 때면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차량을 통제하고, 협조해 준 운전자에게 어김없이 경례로 인사한다. 아파트 주민들은 그를 ‘경례 아저씨’라 부른다.
아파트 경비원은 아침 일찍 출근해서 다음 날 교대한다. 주말이나 명절도 어김없이 아파트를 지키기 위해 출근한다. 여름휴가도 길게 다녀올 수 없다. 자리를 비우는 시간만큼 누군가 그 자리를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남들 다 가는 해외여행도 경비원에겐 그저 딴 세상 이야기일 뿐이다. 이런 현실을 알고 있었기에 한 번쯤 경비 아저씨들이 여행을 갈 수 있었으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주항공에서 감동적인 사연을 보낸 주인공에게 해외여행을 보내준다는 이벤트를 보게 되었다.
‘그래, 이거다! 경비 아저씨들이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좋겠다.’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기까지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곧바로 컴퓨터에 앉아 장문의 사연을 써서 보냈다. 한 달쯤 지났을까? 사연이 선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곤 제주항공 본사 담당자와 영상팀이 서울에서 전주까지 한걸음에 내려왔다.
사연을 보낸 의도와 취지를 설명하고 구체적인 프로젝트 방향을 의논했다. 제주항공에서는 애초 두 명에게 여행경비를 지원할 계획이었지만, 나는 네 명 모두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본사 담당자도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경비원 모두 여행을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곧바로 아파트 관리소와 입주자 대표에게 전화로 상황을 설명했다. 관리소에서도 좋은 일이라며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다. 이 문제로 경비원 파견업체와도 협의했다. 정 안 되면 입주민이 대신 경비를 서는 것까지도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경비원이 해외여행을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시에 자리를 비우게 되면 누군가 경비 볼 사람이 필요했고 아파트 시스템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경비를 섰다가 문제가 생기면 책임소재가 불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아쉽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결국, 여행은 아저씨와 아내 두 명만 다녀오는 것으로 정리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홀로 여행 가는 것이 미안했던 아저씨는 동료경비원과 관리소 직원에게 여행선물을 전했다고 한다.
주민들과 함께 준비하다.
여행 갈 주인공이 정해졌으니 어떤 방식으로 준비하면 좋을지 의논했다. 사람 사이 관계를 돕는 사회복지사이니 당연히 내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주민들이 함께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고 담당자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네이버 카페에 입주민 커뮤니티가 있습니다. 제가 상황을 설명하고 부탁해보면 어떨까요? 분명 주민들도 경비 아저씨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을 거예요. 고마웠던 일, 좋았던 추억, 그리고 여행 잘 다녀오라고 세대마다 아저씨에게 편지를 쓰는 거죠. 그리고 아저씨가 잠시 경비실을 비우면 주민 편지로 경비실을 도배해 버리면 어떨까요?”
“와!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그럼 온블리씨가 주민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어요?”
“네, 그럴게요. 좋은 일이니 주민들도 분명 함께해주실 거예요.”
그렇게 서프라이즈 프로젝트의 밑그림이 완성되었다. 회의가 끝나고 곧바로 입주민 카페에 소식을 알렸다. 역시나 주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너도나도 좋은 일이라며 동참하겠다는 댓글이 이어졌다. 그리고 무려 80세대가 참여했다. 놀라웠다. 이렇게 경비 아저씨를 생각하는 분들이 많았구나! 주민들의 마음이 담긴 편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읽었다. 정말 감동이었다.
서프라이즈 당일
이벤트 당일, 아파트 주민들이 우리 집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아이들 손 잡고 함께 온 가족도 있었다. 참 고맙고 든든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역할을 나눴다. 어른들은 경비실에 붙일 편지와 선물을 정성스럽게 포장했고, 아이들은 경비 아저씨에게 편지를 전달하기로 했다. 관리소에서는 이벤트 시간에 맞춰 아저씨가 경비실을 비우도록 했다. 입주자 대표는 주민 대표로 항공권을 전달해 주기로 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고 성공적으로 진행하는 일만 남았다.
잠시 후 경비 아저씨가 자리를 비웠다는 연락이 왔고 주민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경비실 벽을 주민들의 편지로 도배했다. 그리곤 경비실 뒤에 숨어 아저씨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숨어 있는데, 하나 같이 잔뜩 긴장한 표정이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는지 모른다. 다시 생각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얼마쯤 지나 경비실로 돌아오는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다. 아저씨는 경비실에 붙은 종이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왔다. 경비실에 다다랐을 때쯤 그제야 벽에 붙은 것이 주민들의 편지임을 아셨다. 편지로 도배된 경비실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아저씨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순간 주민들이 환호를 지르며 아저씨 앞에 나타났다. 그리곤 준비한 항공권과 선물을 전해드렸다. 아저씨는 아이들이 편지를 전할 때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사랑해요.”라며 연신 고개 숙이며 아이들에게 인사하셨다.
며칠 뒤, 아저씨는 난생처음 대만으로 여행을 떠났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만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 한번 아저씨를 위한 이벤트가 있었다고 한다. 승무원이 기내방송으로 아저씨를 멋지게 소개한 것이다.
“오늘 저희 제주항공에는 특별한 분이 탑승해 주셨습니다. 밤낮 할 것 없이 아파트 입주민의 안전과 평온을 위해 수고해 주시는 경비원 박성군님이 탑승하셨는데요, 입주민들이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제주항공에 감동 사연을 보내주셨습니다. 밤낮없이 아파트 주민들을 지켜주신 박성군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 순간 아저씨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아마도 자신이 하는 일이 자랑스럽지 않으셨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 자신의 수고를 알아주고 마음 써 준 주민들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주민들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아마도 내가 사는 아파트가 자랑스럽지 않았을까? 경비원 아저씨를 만나면 더 반갑고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글을 마치며
제주항공과 함께한 서프라이즈 프로젝트는 조금 특별한 이야기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아파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주민들이 경비원, 환경미화원에게 감사함을 전하는 캠페인을 제안할 수도 있으며, 지금처럼 코로나 시대에 엘리베이터에 A4용지를 붙여 주민들이 안부를 묻고 응원할 수 있도록 도울 수도 있다.
흔히 아파트라고 하면 삭막한 공간을 떠올리는데 우리 아이가 사는 곳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길 바란다. 이웃과 인사도 하고 서로를 배려하는 아파트이길 바란다. 세상은 특별한 누군가가 하루아침에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실천할 때 조금씩 변해갈 것이라 믿는다.
* 제주항공과 함께 한 경비원 해외여행 영상은 제주항공 유튜브 채널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