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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리하는 김선생님 May 10. 2024

다시 만날 수 있어요

오늘 반찬은 한국어입니다   제15화  소고기뭇국







[ 오늘의 반찬 ] 

V(동사)(으)ㄹ 수 있다/없다


 저는 소고기뭇국을 잘 만들 수 있어요.     

 어렸을 때는 무를 먹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먹을 수 있어요.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어요.





  특별한 날에만 먹는 음식들이 있다. 어느 날의 명칭을 떠올리면 자연히 그날에 먹는 음식이 옆에 따라붙는다. 이를테면 해마다 생일이면 먹는 생일 케이크, 새해의 첫날을 알리는 떡국, 명절 분위기를 노랗게 채우는 노릇한 부침개, 결혼식장에서 시끌벅적하게 먹던 뷔페 음식들이 그것이다.



  우리는 삶의 시작과 이어짐을 축하하며 케이크에 초를 꽂고 촛불을 붙인다. 그리고 삶과의 이별을 기리며 향을 꽂고 향불을 태운다. 생의 시작과 끝에 자리하는 행위들이 조금은 닮아있다는 점이 사소한 위로가 된다.



  이별하는 날에도 밥을 먹는다. 우리나라에서 이별을 상징하는 음식은 육개장일 것이다. 장례 기간 내내 주방 한쪽에서는 쉼 없이 국을 끓인다.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을 내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육개장의 빨간 국물이 잡귀를 쫓아낸다거나, 오래오래 푹 끓일수록 맛이 나는 음식이기에 여러 날동안 계속해서 상을 차려야 하는 상가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슬픔에 빠진 상주가 넋을 놓고 입맛을 잃어도 육개장의 얼큰하고 자극적인 맛 덕분에 한두 숟갈 뜰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야속하게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장례식에 조문객으로 참석할 때마다 육개장을 먹었다. 장례식이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매번 가는 내내 휴대폰으로 장례식장 예절을 검색하곤 했다. 애써 외운 대로 상주 앞에서 인사를 할 때도 낯설고 조심스러워 쭈뼛거리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면 상에 육개장이 나왔다. 괜히 말 한마디 잘못해서 실수를 하게 될까 두려워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빨간 국물만 홀짝였다. 여느 사람들처럼 익숙하게 예를 차리지는 못했지만 여느 사람들처럼 나에게도 육개장은 이별을 상징하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별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으로 가만히 써 보면, 마음속의 주방 한쪽에서부터 소고기뭇국을 끓이는 소리가 들린다.     




  세 달 전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가족 모두가 일 년가량 마음의 준비를 해 왔지만 직접 마주한 그날의 아픔은 생각보다도 컸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었지만 한동안은 쉽지가 않았다. 이별을 준비하는 데에도, 받아들이는 데에도, 그리고 헤어짐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에도 시간이 따로따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삼일장의 첫날. 처음 입어 보는 상복이 참으로 어색했다. 까만 저고리와 치마 안쪽으로 슬픔을 감출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오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이 옷만 봐도 내 슬픔을 알아채 버릴 것 같기도 했다. 각자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잃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상복을 입고 모여 앉아 첫 식사를 했다. 일순간 텅 비어버린 곳에 처음으로 무언가를 채워 넣어 보았다. 상에 육개장이 올라왔다. 벌건 국물을 한술 떠서 먹는데 혀가 아릿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함께 식사하던 어른 중 한 분이 조심스레 입을 여셨다.



  “좀 맵지 않아요?”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저마다 한두 마디씩 말을 얹었다. 지금도 그날의 육개장이 정말 매웠던 것인지, 정신이 들게끔 하는 미각적 자극을 매운맛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음식이 좀 맵다는 상주들의 의견이 주방에 전달되어 다음 끼니부터는 육개장 대신 소고기뭇국을 내게 됐다.



  상을 치르는 사흘 내내 소고기뭇국을 먹었다. 후추 향이 꽤 강했다. 뭇국치고는 소고기가 상당히 많이 들어 있어서 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식사에 큰 문제를 겪지 않을 듯했다. 하루하루가 지나는 동안 처음의 희고 말간 국물이 점차 진해졌다. 시간이 지나니 자극적인 빨간 국물이 아쉬워지기도 했지만, 고기가 많이 들어간 진한 소고기뭇국이 늘 넉넉하고 온화하셨던 할머니를 닮아있는 것 같아서 먹어도 먹어도 또 먹고 싶었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나고, 5월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어버이 없이 어버이날을 보내야 하는 아빠를 생각하면 다시금 어딘가가 텅 비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소고기뭇국을 끓였다.   







       

  전날 사둔 국거리용 소고기를 꺼낸다. 총 300그램이다. 5인분의 국을 끓이기에도 충분한 양이라 두 명분의 식사용으로는 두세 번 나누어 쓰는 게 맞겠지만 그냥 한번에 모두 사용하기로 한다. 남편에게는 고기가 많이 들어가야 제대로 맛이 날 거라고 이야기했다. 반은 맞고 반은 거짓이다. 고기를 과할 정도로 넉넉히 사용하는 건 절반은 맛을 위해서지만 절반은 다른 이유가 있다. 이유의 반절은 우선 내 안에만 고이 묻어 두기로 한다.



  키친타올로 고기 표면의 핏물만 살짝 닦아낸다. 보통 소고기로 국을 끓일 때는 찬물에 10분 정도 담가 핏물을 빼는 게 일반적이다. 고기에서 나는 잡내에 예민한 편이라면 그 방법이 안전하다. 육향을 즐기는 나는 갈비찜을 만들 때를 제외하고는 소고기 핏물을 빼지 않는다. 그대로 사용해야 소고기 특유의 진한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어서이다.



  무는 4센티미터 높이로 썰어 토막을 낸다. 무를 자주 먹지 않는 우리 집은 처음부터 토막 난 무를 사는 편이다. 깨끗하게 씻어 껍질을 벗긴 후 나박김치 모양으로 얄팍하고 네모지게 썬다. 대파는 흰 줄기 부분과 초록색 잎 부분을 섞어 반 대 정도 어슷하게 썰어 둔다.



  냄비에 참기름을 조금 두르고 손가락 한 마디 크기 정도로 잘린 국거리용 소고기를 볶는다. 국간장 한 숟갈, 다진 마늘 한 숟갈도 함께 넣어 살살 볶는다. 짭짜름하고 콤콤한 냄새가 올라온다. 고기 표면의 핏기가 살짝 가실 때까지 볶은 후 물을 600밀리리터 붓는다. 강한 불로 끓이다가 국물이 끓어오르면 무를 모두 쏟아내듯 넣는다. 불을 중간 정도로 줄이고 국간장 반 숟가락, 참치액 한 숟가락으로 간을 한다. 불을 약하게 줄인 다음 무가 반투명해질 때까지 푹 끓인다.



  국물을 떠서 한입 먹어 보았을 때 무의 달큼한 맛이 느껴진다면 미리 썰어 놓은 대파를 넣고 소금으로 나머지 간을 맞춘다. 불을 끄고 통후추를 세 번 정도 갈아 넣고 나서 국자로 한번 휘저어 준다.        


  


  “이거 완전히 고깃국이네. 무보다 고기가 많아서 좋다.”



  식탁에 앉은 남편이 반색하며 눈을 빛냈다. 오늘의 저녁 메뉴가 소고기뭇국이라고 알렸을 때 남편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남편은 뭇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미 재료를 다 사 두었다는 말을 들어 달리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았지만 저녁상에 대한 기대는 조용히 접어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상한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의 국을 보고서는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나는 그저 슬쩍 미소지어 보였다.



  밥숟가락을 들어 공연히 국을 뒤적거렸다. 남편의 말마따나 수저에 무보다 고기가 더 자주 걸린다. 평소처럼 바로 식사를 시작하기가 쉽지 않아서 아이가 장난을 치듯 헛수저질만 거듭하다가 천천히 털어놓았다.



  “오늘 왜 소고기뭇국을 만들었냐면…….”



  짤막하게 이야기를 마쳤다. 몇 번인가 서로 고개를 번갈아 끄덕거리는 것 말고는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았다. 말로 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음식으로 먹먹히 나눴다. 이제야 크게 한술 뜬다. 숟가락 가득 소고기와 무를 얹고 진한 고깃국물을 적셨다. 입에 넣고 씹는데 눈 아래에 열이 오른다. 어릴 적에 툭하면 듣던 말 그대로, 체하지 않도록 여러 번 꼭꼭 씹어 삼켰다. 덩그러니 비어 있던 자리에 따끈한 소고기와 무가 차곡차곡 쌓인다. 넉넉하고 온화하게.     




  어렸을 때 나는 익힌 무를 절대 먹지 않았다. 생선조림이나 갈비찜에 들어가는 무도 싫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소고기뭇국을 제일 싫어했다. 그다지 대단한 맛도 아니면서 물컹거리는 식감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게 만들어서 맛도 기분도 정말 별로였다. 조금씩 나이가 들고 입맛이 자연스레 바뀌면서 어느 순간 익힌 무를 곧잘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소고기뭇국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국물 요리가 되었다. 언제부터 소고기뭇국을 제일 좋아하게 되었는지 아주 당차게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석 달 전쯤부터인 것 같다.   



       





  한국어학당의 봄 학기는 매년 3월 초에 시작해서 5월 중순에 마친다. 지금까지 만난 모든 학생들이 다 사랑스럽고 예쁘지만, 올해 봄 학기에 만난 학생들은 유독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처음으로 학생들과 함께 아픔을 공유한 학기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3월 어느 날. 수업 중간의 쉬는 시간이었다. 챙겨 다니는 텀블러에 식수를 다시 받고 화장실에 들렀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 우리 반 일본 여학생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학생이 나를 보고 흠칫 놀라더니 급히 옆으로 돌아섰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본국에 계시는 할머니께서 위중한 상태라고 지난번에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걱정이 되어 다가갔다.



  “미키 씨, 무슨 일이에요?”



  미키 씨는 잠시 주저하다가 나에게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시베리안 허스키로 보이는 강아지 한 마리가 휴대폰 사진 속에서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곁에서 학생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선생님. 일본에 있는 우리 개가…… 아마 오늘 죽을 거예요.”



  몇 어절 되지 않는 문장을 겨우 뱉어내고서 미키 씨는 울음을 터뜨렸다. 마음이 아렸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는 학생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냥 안아주었다. 넉넉하지 못한 품이라 민망스러웠지만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울음소리가 커졌다. 품에 들어와 있는 여린 어깨가 작게 떨렸다. 가만히 안고 오른쪽 어깨를 토닥이는 동안 이런저런 말소리들이 내 입술을 통해 잠잠하게 하나둘 걸어나왔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제 할머니께서도 지난달에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우리 개도 나이가 많아요. 미키 씨가 지금 슬프고 무서울 거예요. 저도 알아요…….



  미키 씨는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렇게 달래 주다가 문득 학생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미키 씨, 무지개 알아요? 레인보우.”



  미키 씨는 말 없이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한국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나아아중에 미키 씨가 죽어요. 그래서 하늘에 가요. 그때 무지개를 볼 수 있을 거예요. 그 무지개에서 미키 씨는 강아지를 다시 만날 수 있어요. 왜냐하면 강아지는 미키 씨를 계속 기다렸어요. 다시 만나서 재미있게 놀 거예요. 다시 만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미키 씨는 눈물이 가득 차오른 눈으로 날 바라보며 슬피 웃었다. 새싹처럼 자그마하게 돋아나는 웃음이었다. 그러면 됐다, 이제 됐다 생각하며 다시금 어깨를 토닥여 보는데, 언제부터인가 내 손끝도 함께 떨리고 있었다. 바르르 떨리는 손끝을 보니 얼마 되지 않은 기억 하나가 속절없이 떠올라 버렸다. 이 말을, 나는, 그날도 했었다.          




  ……2월, 토요일. 갑작스럽게 온 연락에 남편과 나는 급히 준비해서 병원으로 향했다. 두려웠다. 병실 문을 여는 것도 남편에게 맡기고 나는 남편의 등 뒤로 숨어 들어갔다.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가 여기저기에서 이러저러한 말들을 해왔지만 귀에 꽂히지 않았다. 아무도 공표해주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오늘이 할머니를 뵙는 마지막 날이라는 걸.



  한 명씩 할머니 곁에 바싹 붙어 앉아 인사를 했다. 내 차례가 왔다.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데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 시간이 지날수록 침상에 휴지가 쌓여갔다. 이제는 기회가 없으니 용기를 내고 싶어서, 얼마 전에 읽은 책에 실린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우주에 대한 설명 중 제대로 이해가 되는 건 하나도 없었지만 내가 알지 못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이 생에는 알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한참을 그렇게 미지의 우주 공간에서 부유하고 난 뒤에야 나는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작게 속삭였다. 주문처럼 외는 그 말이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꼭 다시 만나요. 다시 만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올해의 봄 학기도 다음 주면 끝이 난다. 부담임 반 학생들과는 어제 막 마지막 수업을 마쳤다. 수업을 마무리하며 학생들에게 부담임인 나와는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라는 것을 알리니 모두 당황해하며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처럼 재빠르게 교실을 나서지도 못한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서성거리고만 있는 그들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나는 샐쭉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 저 내일은 옆 교실에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어요.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다음 주도 계속 만날 수 있어요.”



  그제야 활짝 웃으며 힘차게 문을 열어젖히는 아이들. 마지막 한 명이 밖으로 나갈 때까지 교실에 머무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물컹해진 무를 씹으며 생각한다. 할머니를 먼저 배웅한 후로 나는 세상에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사랑하는 대상들과의 이별을 늘 두려워하며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우리 중 가장 정이 많으신 분께서 먼저 가 계시니, 언제 누가 무지개를 걷게 되더라도 낯섦과 두려움은 잠시뿐, 활짝 웃으며 힘차게 색색깔의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으리라. 그리던 사람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건 참 가슴 설레는 일이다. 그날이 와도 나는 우주 같은 것들에 대해서만큼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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