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은 기발한 아이디어에서만 나오는 것일까?
창의성은 타고난 재능일까?
일반적으로 창의성을 무언가 새롭고 기발한 것을 만드는 능력으로 생각하며 예술가와 같이 독창적인 사람의 능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그러한 능력은 타고난 재능이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창의성이란 단어에는 항상 위 두 질문이 수반된다.
하지만 창의성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다시 살펴보자면, ‘새롭고, 독창적이고, 유용한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 또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서 새로운 관계를 창출하거나, 비일상적인 아이디어를 산출하는 능력’ 등 그 의미는 다양하다.
그것은 창의성이 ‘창작(創作)’이라는 결과물과 함께 쓰이면서 오해를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르겠다. 창작이야말로 “방안이나 물건 따위를 처음으로 만들어 냄”, 또는 “그렇게 만들어 낸 방안이나 물건”,“예술가가 미적 체험을 통해 예술작품을 구상하고 생산하는 활동”이라는 뜻으로 창의성과는 다르게 ‘예술가’라는 특정한 사람들이 행하는 특별한 행위도 지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창의성’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뿐 아니라 새로운 사고방식이나 관계의 창출 등 보다 포괄적인 뜻이며, 그중 구체적으로 무언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창작’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창작이란 뜻에서 주체를 빼고 행위만을 다시 정의해 보자, 즉, ‘예술’이란 단어를 제하고 읽어보자면 아래와 같다.
여기서 ‘미적 체험’이란 새로운 경험을 의미하며, 구체적인 산물이 될 수 있는 ‘활동’은 생각 등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창의성은 창작이라는 구체적인 산물이나 행동을 하기 전 그 행위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능력이라 할 수 있다.
간단한, 혹은 당연한 얘기인 듯하지만, 이처럼 창의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많은 예언가가 제시하고 있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예측과 관련이 있다. 그들은 서로가 먼저라 할 것 없이 21세기의 시대정신을 ‘창의성’이라 예견하고 있다.
21세기를 살아가야 할 우리는 그 전과 다르게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그러한 변화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는 현재를 보내야 한다. 그렇기에 항상 새로운 관점과 독창적인 시선이 필요하며 그러한 방안으로 우리 모두에게 창의성에 대한 질문은 계속하고 있다. 하기에 조금은 미련한 방식으로 창의성에 대한 질문을 이어가며 다시금 곱씹고 생각해야 할 시간으로 ‘창의성’과 ‘창작’에 대한 이해를 이어간다.
출출한 야밤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냉장고 안 반찬으로 볶음밥을 해 먹을 때도, 라면에서의 달걀이 반숙이냐, 완숙이냐를 따질 때도….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만들고, 그 만드는 과정에는 각자의 취향에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를 누구도 창작이라 하지 않는다.
우선, 위 음식에 ‘창의성’이 있냐는 질문을 먼저 해 본다. 창의성에는 처음과 새로움이라는 수식어가 적절해야 한다.
창의성은 독창성과 개성을 중요시하기에 소위 ‘일반적’이라 인지하는 생산과는 구별된다. 따라서 원작이 있는 모작(模作)이나 모사(模寫), 번안이나 개작 등과도 대비되는 개념이다.
아무리 개인적 취향에 맞게 재료를 골라 볶음밥을 한다고 한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냉장고 안의 재료에서 나올 수 있는 볶음밥의 종류는 이미 누군가, 혹은 과거 먹어본 재료의 조합으로 원작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달걀의 조리방법 역시 여러 방법의 하나를 선택한 취향이니 말이다. - 물론, 아주 특별한 요리도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선 일반적일 때를 예로 들었다.
또한, 창작에는 기계 등에 의한 대량생산과는 구별된다. 그러므로 창작은 ‘창의력’이라는 능력에 의해 산출된 결과 행위 중 하나로 정의하고 있다.
잠시 창작에 대해 더 살펴보자면, 창작은 ‘심리학적 미학’이나 ‘예술 심리학’이란 학문에서 다뤄지는 분야로 이들 대부분은 창작을 미적 체험과 같은 원리로 인식하여 그 본질을 ‘미적 직관’과 ‘미적 감정’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학문의 본질은 “창작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