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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만 Oct 30. 2020

1_6. 창의성의 표현

인간의 창의적 표현은 행동과 언어로…. 다양한 방법으로 발휘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어떤 것을 ‘지시’ 하기 위해 활용된다. 그렇게 지시하는 것은 그림으로 표현하거나, 조각과 같이 형상으로 구상화되기도 한다. 그리고 ‘기호화’ 되어 문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한 지시적 표현은 문자를 제외하고 대부분 큰 의미에서 ‘미술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 창작행위의 표현 방법을 생각하다 보면, ‘인간은 왜 미술을 하는가?’라는 질문으로도 이어진다. 

이러한 질문에 인류학과 미술학자들은 인류 최초의 미술 유적으로 대표할 만한 프랑스의 ‘라스코 동물 벽화’를 통해 답을 찾으려 했다.    


프랑스의 구석기 문화인 ‘라스코 동굴벽화’ 중 일부


라스코 동물 벽화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미술 유적으로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북부의 칸타브리아(Cantabria) 지방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 동굴벽화를 말한다.      


구석기인들이 좁은 동굴의 벽에 황소, 사슴 등을 표현하는 행위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 한 것일까?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 1909년~)의 ‘서양미술사(원제:The Story of Art )’에 따르면, 그 이유를 세 가지 가설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시간의 여유를 즐기기 위한 ‘유희 기원설’이 있고, 두 번째, 수렵을 위한 ‘노동 기원설’, 마지막으로 인간의 기원을 가상의 표현을 통해 현실로 이끌기 위한 ‘주술 기원설’로 보고 있다.      

이를 목적의 관점으로 다시 정리해 보자면 ‘의식의 표현’, ‘물리적 성취’ 그리고‘심리적 안정’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렇게 미술은 인류의 사상과 함께해 발전, 혹은 진화해 오고 있음은 많은 이들도 공감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미술의 역사에서 인간이 추구하려는 ‘아름다움’에 대해 ‘가치로서’, ‘현상으로서’, 미를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미학(美學, Aesthetics) ’이다. 미학에서 바라보는 미의 본질은 크게, ‘자연의 모방’과, 상상력을 포함한 ‘감정표출’로서의 자유로운 표현으로 나눠 이해하고 그것의 방식으로 ‘형식미’를 추구하는 장식 충동과 ‘유희 본능’을 위한 자기 목적적인 고유의 쾌감 추구로 크게 나눠 이해하고 있다.   

        


 · 이집트 미술 (B.C. 3100년 ~)                    

앞서, 라스코 동물 벽화의 구석기 원시미술과 비교하면 심리적 안정과 주술적 기원을 시각적 인상보다는 기호적 의미의 형식에 의존한 표현이 특징이다.      



· 그리스/로마 미술 (B.C.10세기 말 ~ 1세기)

    

노예제도에 의해 학예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로 말미암아, 자유로운 사고와 철학이 발달하였고, 사실적이고 섬세한 표현을 통해 인간 자신에 대한 엄격한 숭고미를 추구한 주술적 모습을 엿볼 수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 당시 시대의 정신과 의식을 표현한 유희적인 모습도 엿볼 수 있다.



· 중세 미술(5세기 로마제국의 몰락 후)    

종교를 위한 주술의 미술의 시대로 볼 수 있지만, 종교를 통한 지배계급의 물리적 성취를 위한 노동 기원의 모습으로도 엿볼 수 있는 유희적 표현 말살의 시대였다. 따라서 이 시기를 ‘암흑시대’라 보기도 한다. 이집트 미술과 같이 형식에 의존하며 따랐다.



· 근대미술(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등 14세기~19세기)

 

근대미술은 중세시대의 야만과 인간성 말살의 시대에서 벗어나고, 고대의 그리스· 로마 문화를 이상으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운동으로 이탈리아로부터 시작되어 전파되었다. 이러한 문화부흥의 시대를 ‘르네상스’라 하는데, 표현적인 측면에서는 평면의 회화에 공간감과 거리감을 통한 사실적인 재현기술의 연구와 발전을 이룬 시기였다. 이후, 바로크 미술에서는 빛과 그림자로 인한 강한 명암 연구, 로코코 미술은 귀족층을 대상으로 한 장식성이 강한 미술로, 소위, ‘잘 그린’,‘아름다운’ 그림으로 인식할 수 있는 기술적 부분이 정립된 시기이다.    


 

·19세기(사실주의, 인상주의)   

          

19세기에 이르러 사진기의 발명으로 더는 미술을 통한 사실 재현이 무의미해졌으며, 휴대 및 이동 가능한 미술도구의 발전으로 화가는 실내의 작업실을 벗어나 자연의 빛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예술가에게서의 자유는 종교나 귀족의 의뢰를 통해서가 아닌, 작가 개인적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로 인해 귀족의 의뢰에 의한 초상화나 종교적 목적의 그림이 아닌, 시골 아낙네의 고달픈 모습이나 평범한 삶의 현장 모습 등, 예술가의 개인적 사상과 의지를 투영하는 미술로 미술은 크나큰 변화가 이뤄졌다. 즉, 의식의 표현이 절대적인 미술 활동의 목적이 되던 시기였다. 


물론, 당시에도 주술이나 노동을 위한 표현활동은 이어졌을 것이다. 

다만, 19세기에 이르러 미술표현의 목적이 풍부해졌다고 말할 수 있고 그 이유가 사진이나 물감의 개발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기억해야겠다. 그러한 창작 표현의 변화는 이후, 20세기에 이르러 또 다른 크나큰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한 변화는 또 다른 관점에서의 이해할 필요가 있으므로, “3부. 창의적 사고”에서 이어가려 한다. 




이렇게 인간이 아니, 예술가가 자기 생각을 표현하려 할 때부터였을까?, 그러면서 예술가가 배고픈 직업일 수 있는 시기도 시작되었다.


과거 귀족이나 종교단체를 위한 그림은 의뢰를 통한 제작으로 금전적인 안정을 기반으로 그림이 그려졌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당시, 누가 시골 아낙네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 돈을 지급하려 할까?,

거리를 나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언덕 위의 그림자와 나무, 수선화를 그린 그림을 누가, 무슨 목적으로 집 거실에 걸어두고 싶어 했을까?, 


그리고 그것의 무엇에 가치를 인정하려 했을까?, - ‘돈 맥 글리(Don McLean, 1945년~ 미국의 가수)’의 ‘빈센트(Vincent)’라는 노래의 가사도 그러하다. - 과연 그들은 무엇을 위해 비싼 물감을 이용해 소비자가 원하지도 않은 그림을 그리는 데 인생을 걸었을까? 다시 말해, 소비자가 없는 생산활동을 하려 했을까?



 근대까지의 예술가와 예술 활동은 귀족이나 종교기관의 의뢰에 의한 주문생산을 통한 제작이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마치, 현재 기업 내 홍보실에서의 다양한 창작물과도 비교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19세기에 나타난 자기감정의 의식적 표현이 강하게 생겨난 것은 지금의 미술가가 ‘예술’과 ‘디자인’으로 구분 짓게 하는 시작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역사는 따로 봐야겠지만, 이러한 질문을 이어가다 보면, 창작의 표현은 앞서 언급한 개체 보존의 본능으로 ‘선언적 지식[Declarative Knowledge, 宣言的 知識]’의 본능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확신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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