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는 이제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조력자(Facilitator)로서의 디자이너

by 리애

한때 나는,

좋은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단단한 신념과 안목으로 '완성'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디자인은 아름답고 정교해야 했고, 누구나 사용하기 편리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디자이너가 정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다양한 공간과 사람을 기획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나는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디자인이란 '만드는 일'이기 이전에,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조율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그 변화는, 아주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됐다.

"디자인은 누가 결정하나요?"
"그건 정말 사용자 입장에서 만든 걸까요?"



질문이 아니라, 듣는 일에서 시작된 디자인


나는 공간을 오래 들여다보는 편이다.

디자인 대상보다 사람의 흐름, 멈춤, 머뭇거림 같은 것에 더 눈이 간다.

그런 관찰 속에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사람은 '설계된 공간'보다,
'자신을 환영받는다고 느끼는 공간'에 오래 머문다.

하지만 그 '환영의 감각'은 디자이너 혼자 만들어낼 수 없다.

그 공간을 사용할 사용자와 소비자, 그리고 클라이언트의 말과 표정 속에 이미 담겨 있다.

디자이너는 그들의 요청 뿐 아니라,

말하지 않은 욕망과 조심스러운 우려, 막연한 기대까지 함께 듣고 번역해야 한다.


때로는 너무 구체적인 요구 뒤에 숨은 본질을 찾아야 하고,

때로는 모호한 감각을 형태와 구조로 끌어올려야 한다.

디자인은 시각적 완성도가 아니라

사람의 감각과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묻고, 기다리고, 듣는 일에 가깝다.



퍼실리테이터, 말 대신 구조를 만드는 사람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는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설명하지 않아도 말이 오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사람이다.


디자인에서 퍼실리테이터란,

해답을 미리 정해놓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언어로 문제를 구성할 수 있도록 여지를 만드는 사람이다.


디자인 회의에서든, 공간 기획에서든,

내게 점점 중요해진 건 '내가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보다,

상대가 무엇을 편하게 말할 수 있는지를 설계하는 일이었다.

퍼실리테이터로서의 디자이너는
말의 중심에 서기보다, 말이 흘러가는 구조를 만드는 사람이다.



완성보다 더 어려운 일, '함께 만들기'


퍼실리테이터로서의 디자인은

누구보다 느리고 복잡하고 불확실한 일이다.

디자이너가 혼자 만든 결과물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만들고 있다고 느끼는 과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일은 완성보다 관계의 설계에 가깝고,

기술보다 신뢰를 디자인하는 일에 가깝다.

함께 만든 디자인만이,
함께 유지되고, 함께 책임질 수 있다.
그것은 디자이너의 능력이 아니라
공동체의 감각에서 비롯된다.

퍼실리테이터로서의 디자이너는

형태보다 구조, 결과보다 과정, 개인보다 관계를 믿는다.



나는 더 이상 정답을 만들지 않는다


이제 나는 디자인을 할 때, 먼저 묻는다.

이 공간은 누구의 일상 위에 놓일 것인가?

무엇이 불편했는가보다, 무엇이 지켜졌으면 좋겠는가?

무엇을 더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열어둘 것인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나는 점점 더 결과보다 과정을 설계하는 사람이 되고 있다.

설계자는 여전히 나이지만,

내가 만든 도면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눈 질문과 시선이 공간에 스며들기를 바란다.



퍼실리테이터로서의 디자이너는

결정권자가 아니다.

디자인이라는 언어가 소수의 정답이 아니라,

다양한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길 바라는 사람이다.


디자인은 이제, 함께 묻고, 함께 살아보려는

조용한 구조의 제안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구조를,

오늘도 질문하며 설계하고 있다.




각주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 : 조력자. 사용자와 공동체가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디자이너. 설계자가 중심이 아닌, 참여자가 주도하는 디자인 환경을 조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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