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혼자 외롭게 신념을 지킨다는 것 더러운 사람들 속에서 혼자 살아가는 거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예전에는 왜 와닿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때는 그래도 몇몇은 같은 신념을 가지고 삶을 공유해서였을 것이다.
신념을 지킨다는 것 그리고 그 신념이 타락되는거 그것은 너무나 쉽게 무너지게 할 수도 있겠지만, 더욱 견고히도 만들 수 있다. 그럼 언제 쉽게 무너지게 되는 것일까?
자신의 신념을 바꾸는 것에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자기 합리화를 손바닥 뒤집기처럼 쉽게 할 수 있는 사람들 그것이 과연 신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화 암살에서, 염석진(이정재)은 이런 말을 한다. 왜 변절했는지에 대해서, 언제 독립이 올 줄 몰랐다고 이렇게 길지 몰랐다고 말이다.
시간에 지배됨에 있어 변절이 과연 용서가 되고, 자신의 신념 역시 무너지고, 무뎌지는 것이 오랜 시간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져서 일까.
처음과 다른 사업의 방향과 그리고 그 속에서 적응이라는 말로 자기 합리화와 시간의 흐름이라는 익숙함으로 둔갑한 신념의 무뎌짐. 그러나 매일매일을 처음의 마음과 나의 신념을 돌아본다.
더러운 사람들 속에서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말이다. 올바른 삶은 시간이 아무리 길고,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 있을지라도, 양심이라는 본인은 알 수 있는 그 마음이 있기 때문이기 말이다. 아무리 은밀한 곳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이 시간과 적응이라는 말로 대변이 될 수 없는 것은 그러한 행동이 떳떳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본인 스스로에게 자문할 때 알 수 있기 때문이기 말이다.
그러나, 그 자문에서 자기 합리화를 쉽게 하고 그런 양심마저 없는 더러운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럴 때마다 세상이 불공평하고, 그러한 사람들이 더 잘 산다고 말을 한다. 그리고 잠깐의 자긴의 신념만 눈감으면 되지 않냐고 말이다. 혹은 그런 것이 사회생활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사회는 오래가지 못하고, 그런 조직 역시 오래갈 수 없다. 시대의 흐름에 아무리 몸을 잘 바꾸고 드러나지 않게 은밀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 어둠은 오래갈 수 없다. 그러기에 인류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며, 세상은 그런 더러운 사람들보다 더 선한 사람들이 많기에 버티고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 생활에서 특히, 한국사람들, 아니 한국 남자들은 이상하리 만큼 베트남에서 본인의 신념을 무너트리는 행동과 삶을 산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자랑인 것 마냥 으쓰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카르텔을 형성하여 눈감아 준다. 의뢰 남자라면 당영하다는 식의 이상한 논리를 가지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에겐 샌님이라며 이상한 눈빛과 간이 작다는 식의 말이 되지 않는 프레임을 만든다.
올바르지 않은 행동의 당위성에 대해서 어째서 이상한 프레임을 만드는 것인지.
신념을 지키고 산다는 거 그것이 이렇게 어려울 수 있구나 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말은 쉽다. 누구나 경험하지 않을 일을 제 3자의 입장에서 말을 해줄 경우 말이다. 나 역시 그러했었고, 그랬으니까.
독립운동가의 삶을 보고, 끊는 피로 내가 그 시절에 살았더라면 하는 가정에서도 말이다. 나 역시 독립운동을 했을 것이라는, 그러나 그 시절 끝도 안 보이는 삶 속에서 가족과 동료의 죽음마저 눈 앞에서 마주하고도 신념을 가지고, 지킬 수 있었을까?
하루하루 신념을 지키고 올바르게 삶을 사는 것이 어렵고, 일상의 평범함이 소중하다는 것을 매일매일 느끼며 산다. 더러운 사람들 그렇게 더럽게 사는 것과 추접스럽게 삶을 사는 것이 과연 올바른지 되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