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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ree Oct 19. 2022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사랑스러운

#1 빨간색 이층 버스

코로나로 미뤄진 늦은 신혼여행을 떠났다. 남편의 회사를 그만두고 떠난 우리의 28일 여정, 그 시작은 영국이었다. 해가 어둑 해질 즈음 히드로 공항에 도착해 공항철도를 타러 가는 길 마주한 첫 런던은 분홍빛을 머금은 강렬한 노을이었다. 밤 9시가 넘어서야 해가 넘어가고 있는 것부터가 이국적인 첫인상이었다.



택시를 타고 첫 숙소로 이동하며 보이는 풍경은 나무 한그루 마저도 설렘을 주었다. 이제 진짜 여행이 시작되었다고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어두운 길가 네온사인 아래를 걷는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구도 마스크를 끼고 있지 않았다. 마치 코로나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열두 시가 넘어서야 잠들었는데 시차 때문인지 새벽 6시에 눈이 번쩍 떠졌다. 혼자 테이블에 앉아 어디로 가볼지, 무엇을 먹을지 끄적이다 보니 남편도 뒤척이며 일어났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아침을 먹을 카페도 찾을 겸 숙소 근처로 한 바퀴 슥 산책을 했다. 빨간 대문, 야외 테이블, 2층 버스, 배낭을 메고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꿈을 꾸나 싶기도 했지만 선선하게 부는 바람은 꿈이 아니었다. 



걷다가 7시 반쯤 테이블마다 꽃이 놓인 숙소 바로 앞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나름 대로변이라 출근하는 자전거 부대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분명 폭염이라고 들었는데 반팔이 제법 쌀쌀한 날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통을 벗은 채 배낭을 메고 자전거를 타거나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라떼와 핫초코, 크로와상 샌드위치와 머핀이 런던에서 우리의 첫 끼였다. 



고등학교 때부터인가, 요상하게 이층 버스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런던에 뭐가 있는지 어떤 나라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빨간 이층 버스와 런던아이가 좋았다. 언젠가 유럽여행을 가게 된다면 꼭 가겠다고 다짐한 지 십 년이 넘어서야 그 로망을 이뤘다. 지하철을 타면 금방 도착하는 곳도 굳이 이층 버스를 타고 빙빙 둘러가기도 했다.


버스에 올라타면 무작정 이층으로 올라갔고 맨 앞자리가 비어있는 날은 뒤도 보지 않고 앞으로 직진했다. 이층 맨 앞자리에 앉아 보는 풍경은 걸으면서 볼 수 있는 풍경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의미 없이 찍어온 풍경 동영상들은 저장공간이 부족하다는 메세지가 떠도 하나도 지울 수 없었다.


영국의 어느 해변가에 살고 있는 친구의 말에 의하면 그 동네는 2층이 뚫린 이층 버스가 많다고 했다. 그래서 나뭇가지에 사람들이 긁히고 다칠까 봐 주민들이 정원용 가위를 들고 버스에 올라타 걸리는 가지들을 잘라내기도 한다고 했다. 그 이야기가 어찌나 로맨틱하게 들리던지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스윗가이들로 보였다.




사실 남편은 나와 달리 여행에 대한 애정이 없어서 열 시간 넘게 비행을 해서 유럽까지 가야 하는 이유부터 설명해야 했다. 다행히(?) 따라와 줬고 오랜 로망을 이뤄 눈길 닿고 손길 닿는 곳마다 벅찬 마음의 나와는 다르게 그저 한국에서 보기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이층 버스'라는 존재를 신기해했다. 시간 쓰고 돈 쓰고 체력 써야 하는 여행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던 남편이 여행에 대해 뭐든 작은 관심이라도 가져주는 게 고마웠다. 


나의 빨간 이층 버스라는 로망을 이루기까지 조금 오래 걸렸지만 남편과 함께라 좋았다.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오직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함께 해주고 욕심 많은 나의 일정이 하루에 만 오천보씩 걷게 해도 군말 없이 따라와 주는 남편에게 첫날부터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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