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산책
달리기를 하고 온 날 보며 친구들이 묻는다. 재미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꾸준히 할 수 있어? 그렇다. 달리기에 대해 진심이었던 마음이 반쯤 꺾였다. 나는 말한다. 재미없어요, 힘들어요. 오늘도 뛰고 오면서 생각했다. 야아, 이쯤 되면 좀 잘 뛰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이만큼 뛰었으면 속도도 좀 빨라지고 (아니면 거리가 늘어나던지) 덜 힘들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고백하자면 지난 달에는 달리기를 시작한 이래로 가장 설렁설렁 뛰었다. 기껏해야 21번, 백신을 맞는다는 핑계로 쉬엄쉬엄 달렸고, 기록을 보니 한 달에 100킬로미터도 채 달리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11월이 시작되었으니까, 첫 날이니까 싫은 마음과 귀찮은 마음을 끌고 양재천 으로 나섰다. 트랙 위에 올라서서 뛰어야지, 하는 데 까지도 발동이 느리게 걸리는 날이 있지만(많지만) 오늘은 이후 일정이 있으니 서둘러 시작한다. 1킬로미터를 넘어가면 멈추고 싶다. 그런 마음이 지금도 든다. 계속 끝없이 멈추고 싶은 나를 살살 달래야 한다. 어딘가 새로운 풍경을 보도록 한눈을 팔게 하거나 저기 바로 앞에 보이는 두 번째 다리까지 달리자고 설득하거나. 아무튼 쉼 없이 나는 나를 독려하며 몇 킬로미터를 꾸역꾸역 간다.
중간 중간 거리를 확인하고, 늘지 않는 속도에 좌절하고 가볍지 않은 몸뚱이에 절망하며 매일의 반복에도 역시나 나아지지 않는, 심지어 재미도 덜한 이 달리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뭘까. 이미 여기저기 소문 낸 게 가장 큰 이유일까, 하다가 그래도 뛰고 있다는 건 뭐라도 한다는 거니까, 뭐라도 하는 걸 이렇게나 선명하게, 투명하게, 가감 없이 보여주는 행위이니까, 나는 나를, 스스로에게 대단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것 같다. 갖고 싶은 걸 가져 본 기억이 별로 없고, 원하는 것을 이루어 보지 못한 경험이 더 큰 나는 이렇게 내 의지대로, 내가 원하는 만큼 명확하게 갈 수 있는 단 하나의 행위. 꾸역꾸역 하다보면 어디로든 향한다.
사는 게 그랬다.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 더 많았던, 불행의 기억이 지배했던 빛이 없는 터널 같은 이십대와 삼십대를 지나면서, 뭐라도 하는 게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보다 낫다는 걸 내 몸이 아는 가보다, 한다. 그 사이 사이 반짝이는 보석 같은 순간, 그 조각보를 모아 애착 이불처럼 가슴에 품고 여기까지 왔다. 이만큼 살았다. 40여분 달리기에서 힘든 순간이 35분 정도, 그 사이 사이 괜찮은 순간을 모으면 약 5분쯤 되지 않을까.
체육공원 끄트머리까지 쉬지 않기로 마음 먹는다. 뛰어서 짧은 터널 같은 굴다리를 지나면 오른편으로 검고 푸른 하늘과 어둠에 기댄 들판 풍경이 펼쳐진다, 그 풍경을 보기 위해 멈추지 말고 뛰기로 한다. 날이 좋은 날이면 롯데타워의 붉은 불빛이 반짝이고, 1킬로 남짓 더 뛰어가면 내 키를 훌쩍 넘는 억새 풀이 지천이다. 하천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까지, 저 너머에 고고히 서 있는 백로가 중대백로인지 쇠백로인지 직접 확인할 수 있을 때 까지, 흰색에 가까운 노란 불빛의 가로등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벚나무 단풍들을 바라보며 뛰다보면 이제 이 길에는 나와 발자국 소리, 가을의 찬 공기가 남는다. 그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까지 더해지면 나는 완전히 설레고 완벽히 벅차다. 그 음악이 무엇이든, 베토벤의 월광,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타임, 커트 엘링의 앤드 위 윌 플라이, 혹은 페퍼톤스의 어떤 곡이든 장르와 템포, 피아노와 목소리, 전자음과 기타 소리에 상관없이 탄성이 나온다.
그 즈음 알게 된 독일 출신 성악가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를 들으며 달리던 중이었는데, 마지막 500미터를 남겨두고 또 하나의 굴다리를 지나 고층 아파트가 왼편으로 길게 늘어선 우리 동네의 중심부에 들어선 순간, 귓가에 종소리처럼 명징하게 울리던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와,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나. 부드럽지만 청아한 떨림으로 알아 듣지 못하는 이탈리아어의 가곡과 함께 나는 하얀 불빛의 마천루 아래 서 있었다. 가쁜 숨 속에서 들을 수 있는 환희가 있었다. 그 시간은 크리스마스 스노우볼처럼 마음 안에 둥글게 모여 있다.
나는 목표한 5킬로미터를 달렸고, 달리면서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고, 그렇게 마주한 순간들, 찰나와 다름없는 벅찬 순간들이 쌓인다. 주머니가 제법 볼록해 졌다. 그만 두고 싶을 때면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잡히는 걸 하나 꺼내 본다. 이렇게 한 번 더, 하루 더, 100미터 더. 그것들이 모여 지금이 되었다는 걸 아니까, 그렇게 두 다리로 뛰고 있고 내 의지로 가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순간들 덕분에, 뭐라도 또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