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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 째 계절

소설과 이야기 사이

by 산책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건물에서 나와 큰 도로와 면해 있는 보도블록에 서면 바로 눈앞에 하늘을 향해 끝없이 올라가는 사각형 건물과 이 모두를 내려다보는 크레인이 있다. 퇴근시간, 동작을 멈춘 크레인과 입을 다문 건물 뒤로 해가 지고 있었다. 이 길을 따라 계속 걸어 나가면 시내로 오가는 버스가 줄을 이어 달리는 길이 있고 왼편 어깨에 석양을 걸치고 5분쯤 더 걸어가면 지하철 역 입구가 입을 벌리고 있다.

해가 지고 바람이 분다. 겨울 속에 봄을 품은 바람. 차가운 공기 안에 겹겹이 온기를 안은 바람, 그가 잘 알고 있는 바람이었다.


흰색이 뒤섞인 파란색 하늘 안으로 붉은 해가 들어가고 두 계절이 뒤섞인 바람이 코 끝에 닿는다. 그는 버스 정류장에 멈춰 섰다. 지하로 들어가면 놓치고 마는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는 바로 앞에 선 파란 버스 위에 올랐다. 석양을 옆에 두고 가기로 한다. 보랏빛과 붉은빛이 층을 이루어 퍼진 하늘을 본다. 얼마 안 가 사라질 색인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붙잡고 싶다.

전용차선을 타고 버스는 얕은 언덕을 넘는다. 키 큰 나무에 가려져, 해도 하늘도 얼마큼 달라졌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버스 창 밖으로 그림자만 달릴 뿐이다.


' 나 늦어. 저녁 먼저 먹어.'


문자를 보내고 버스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검은 유리창에 금테 안경이 반짝였다. 고개를 넘어 2호선과 4호선 지하철역이 맞닿은 정류장에서 사람들이 내리는 사이 빈자리가 생겼고, 그는 내릴까 잠시 망설였지만 계속 타고 가기로 했다. 마침 잡아 탄 버스는 한강을 건너고, 어디로 가겠단 목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강을 건너고 싶었다. 한강을 건널 때 보이는 올림픽대로 위 차량들의 헤드라이트와 빌딩 조명과 아파트 전등 빛이 은하수처럼 쏟아지는 도시의 저녁이 보고 싶었다. 해는 이미 사라졌고 남빛이 붉은빛을 끌어안고 있었다. 다리 저 편으로 보이는 63 빌딩은 금빛을 털어내고 노란 알전구를 단 사각 트리로 단장하고, 고층 건물 옥상의 붉은 전구는 도심 속 등대처럼 깜빡이며 하늘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삼각지 역에서 내리기로 했다. 지하철을 갈아타고 합정으로 가야겠다고, 약속 없이 목적지를 정했다.


해가 지고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이었다. 양쪽에 걸친 계절 냄새를 맡으면, 그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에 목이 메었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밤, 찬 공기에 묻어오는 봄 냄새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목까지 올라오는 체기를 느꼈다. 숨을 크게 쉬었다 뱉으며 아파트 단지 주변이라도 두어 바퀴 돌 때쯤이면 먹먹한 마음이 천천히 사라졌다. 이 계절 바람 냄새에는 신입생 기운이 배어 있다고, 그 아이가 말했었다.


- 계절이 네 번 뿐이라니 아쉬워. 다섯 번째 계절이 있었으면 좋겠어. 겨울과 봄 사이에 말이야. 왜, 개와 늑대의 시간이니, 인디언 썸머니, 사람들이 규정한 시간 사이에 다시 이름을 붙이는 게 있잖아. 그렇게 말이야. 초봄, 늦겨울 이런 말 말고, 이렇게 신입생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공기가 불어오는 계절에 이름이 있다면 마음껏 바람날 텐데!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가능할 것 같은 이 바람을 어떻게 그냥 보내냐고.


3월을 앞둔 2월에 불어오는 바람은 그런 냄새를 품고 불어온다고, 그 아이가 말했었다. 생기를 내뿜기 위해 단단히 준비하고 있는 만물이 세상으로 넘치는 기운을 흘려보내는 거라고. 더 깊게 호흡해봐. 그 아이를 만난 건 대학에 들어가서였다. 대학생. 당연할 줄 알았지만 당연할 수 없었던 명찰을 따기 위해 그는 처음으로 무릎을 꿇었고, 그렇게 얻은 이름표 안에서 그 아이를 만났다.

IMF라고 부르는, 무너진 독처럼 쏟아져 내린 불행의 시작. 텔레비전에서 금 모으기를 하며 국난극복 의지를 전 국민에게 표명하라 부르짖던 그때, 그는 매일 밤 찾아오는 빚쟁이들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안 계시는데요. 공장에 가셨어요.'


처음에는 조용하게 그를 구슬리고 달래던 빚쟁이들은 통화가 반복될수록 그에게 소낙비 같은 말을 퍼부었다.


'사기꾼 새끼 어디 있는지 말 안 해? 니 애비 믿고 말도 안 되는 데다가 내가 얼마를 처넣었는지 알아? 너도 니 애비랑 똑같이 헛꿈 꾸지 마. 대학? 좋아하시네. 니 등록금 낼 돈 있으면 내 돈부터 갚으라고 해!'


열아홉에서 막 벗어난 그가 학교 울타리 밖에서 들은 말은 모질었고 이유가 없었지만, 대꾸할 무엇을 찾지 못했던 그는 잠자코 귀를 내줬다. 그들이 떼인 돈이란 것과 등록금이 딱 그만큼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몇 천만 원과 몇 백만 원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그도 그의 아버지도 손에 쥘 수 없는 액수였단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 대신 송파에 사는 작은 아버지를 찾아가 등록금을 빌려달라고 말하며 무릎을 꿇었다.


'매달 30만 원씩 갚을게요'


아버지의 이복동생인 작은 아버지는 등을 돌리고 듣고 있었다. 그리고 신입생 등록 마감을 삼십 분 앞두고, 고지서에 적힌 액수만큼 통장에 넣어줬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지만, 꿈대로 살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가 가고 싶어 했던 학교와 가야 했던 학교의 간극만큼, 그는 꾸었던 꿈에서 발을 뗐다. 색이 날아간 남색 모직 코트를 걸치고 주머니에 차비와 밥값을 겨우 넣고 이 강의실과 저 강의실 사이를 그림자처럼 오가던 날들 사이, 그 아이를 알게 됐다.


'우리 동아리 안 들어올래? 금요일에 신입생 환영식 있는데 같이 가자.'


계절을 바꿔 입은 옷처럼 어색하던 때 마주친 다정한 초대 덕분에 그는 비로소 봄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합정 전 상수역에서 내렸다. 표지판을 찾아보지 않아도 되는 곳. 4번 출구로 나갔다. 짙은 먹색 패딩의 백팩을 멘 회사원이 올 만한 밤은 아니었다. 가벼운 코트에 에코백을 든 사람들을 스쳐 익숙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일본 라멘 집을 지나 아래로 내려갔다. 벚꽃 나무는 겨울이고, 화력발전소는 공사 중이었다. 익숙한 카페와 익숙한 밥집, 익숙한 골목. 양화진 앞 고가 아래에서 오른쪽으로 걸어 나와 합정역 사거리까지 비스듬한 길을 올라가던 중 문자를 확인했다.


'언제 와? 밥 먹고 와?'


매달 30만 원씩 작은 아버지에게 갚는 조건으로 얻었던 티켓은 다행히 다른 친구들과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도와주었다. 운이 그렇게까지 나쁜 건 아니라고 그는 매 해 마지막 장 달력을 넘길 때마다 생각했다. 졸업을 했고 학자금 융자가 남긴 했지만 취업도 했다. 결혼을 하고 아내와 아이가 있는 삶까지. 빚쟁이들이 그에게 했던 저주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성실하게 집과 회사를 오가며 아버지처럼 사업이나 주식 투자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들어오는 월급으로 저축을 하고 전세금 융자도 갚아 나가는 중이었다. 20년째 빚과 함께 살고 있지만 불안보다는 안정이 있었고 헛꿈 꿀 새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힐 때가 종종 있었다. 아침 7시 반 지하철과 점심 산책, 퇴근길의 지하철이 매일 같은 각도로 깔끔하게 생활을 비질 해대지만 빗자루 끝에는 떨어지지 않는 쓸쓸함이 매달려 있었다. 안온함이 둥지를 틀었지만 그 뒤에는 가지 못한 길, 갖지 못한 삶, 가질 수 없게 된 것에 대한 마음이 남았다.

대기업 최연소 상무 타이틀을 달고 신문 지상에 얼굴을 남긴 고교 동창이나, 고등학교에서 수학 교사를 하는 친구를 볼 때, 뉴욕에서 회사를 다니는 동창이 동문회를 소집할 때처럼 그가 가졌던 환상과 꿈이 떠올랐다. 빚쟁이에게 쫓기던 해에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독일로 유학 보내주겠다는 둥, 미국 고모네에 가서 공부를 더 하라는 둥 했지만 그런 말들은 쫓기듯 이사 나오며 쓰레기장에 던져버린 동화책과도 같았다. 집 팔고 남은 돈으로 빚을 갚았지만 여전히 빚은 남았고, 그는 재혼해 살고 있는 이모네로 보내졌다. 일 년만 부탁한다며, 엄마가 금반지를 판 10만 원을 가방 앞주머니에 넣어줬던 밤도 이 계절쯤이었다. 그는 처음 만난 이모부 차 뒷자리에서 갈색 이스트팩의 앞주머니를 꼭 쥐었다.

어디로 떨어지는 알 수 없는 바닥에서 그는 그래도 살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아버지의 유산 같은 허영도 살아남았다.

물론, 대체로 남았는지도 모르게 잊어버리거나 가끔은 잊고 살기도 하지만, 불어오는 바람은 알람시계처럼 몸의 어떤 기억들을 깨우고 그는 그럴 때면 어딘가를 걸었다.


'먹고 갈게. 그렇게 많이 늦진 않을 듯.'


답장을 보내는 그의 오른손 네 번째 손가락에서 은색 반지가 다른 손가락 뒤로 숨어 버렸다. 이 도시에 오면 그는 스무 살의 어느 날로 돌아갔다. 잠실 역 지하상가에서 오천 원짜리 은반지를 나눠 끼고, 라면 한 그릇에 공깃밥을 시켜 나눠먹던 때로. 젊음 자체가 꿈이 되던 날이었다. 내일의 행복을 할리우드 영화 속 해피엔딩처럼 기대했다. 바랐던 것의 커트라인쯤은 얼마든지 다시 따라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마음먹는 것이 가능했고, 고단한 날 속에도 내일의 설렘이 존재했던 날들. 그는 이제 더는 가질 수 없는 신입생의 기운을, 날숨 한 번에 날아가 버릴 그 기운을 조금만 더 담아두고 싶어 잠시 숨을 멈춘다.


- 숨을 못 쉬면 고통스럽고 그래서 사람들은 죽는다고 생각하지만, 숨을 참아서 죽는 사람은 없어. 두려움을 이겨내야 되는 거야. 숨을 참고 있으면 내 쉬고 싶어서 횡격막이 움찔하거든. 다이버들 사이에서 컨트럭션이라고 하는 그 순간을 지나야 돼. 그럼 더 오래 참을 수 있어. 오래 참으면 뭐가 좋냐고? 야, 숨 참기 대회에서 일등 할 수 있잖아.


그 아이가 웃었고, 그는 따라 웃었다. 그 아이는 별 것을 별 것 아닌 것으로 말하는 재주가 있었고, 여름을 앞두고 그 아이는 물었다. 우리는 별 건가?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 아이의 손을 잡았다. 별 것과 별 것 아닌 것.


걸었다. 검은 아스팔트 위로 쏟아지는 노란 등불을 지나 건물과 건물 사이, 빵집과 슈퍼, 카페와 술집 사이 골목과 골목을 돌아 멈추고 걷고 멈추고 걷다 마침내 정지했다. 선이 명확히 그어진 지도 위의 영토, 통행증이 없으면 거쳐갈 수 없는 곳처럼 그는 항상 그곳에서 멈췄다. 비보호 좌회전 표시가 있고, 미용실과 꽃집을 마주하는 신호등 앞에서 멈췄다. 보이는 길 앞에는 고개가 있고, 가로등이 하나 건너 하나씩 켜져 있는, 목적 없이는 넘어설 일 없는 길이었다. 두려움을 이겨내야 되는 거야, 참는다고 죽지 않아. 폐에 남아 있는 공기가 그의 등을 살며시 밀었다. 고개를 넘으면 만나는 동네까지. 그 아이의 자취방이 있었다는 동네. 과 동기들이 이삿짐 나르는 걸 도와준다고 몰려 가던 때가 2월쯤이었다. 새 학기를 앞두고 있었다. 그는 별 것 아닌 일이 된 그 일을 떠올렸다. 뒤죽박죽 순서 없이 처박아 둔 기억 속 사건들이 이제는 순서를 잃고 말았지만, 마지막은 기억했다.


- 이제 그만 너랑 헤어지고 싶어.


그때, 그는 헛꿈이 무엇인지 알았다. 잡을 수도, 만질 수도, 돌릴 수도 없는 마음이라는 헛꿈. 기대와 희망이라는 헛꿈을 알았다. 왜냐고 물어보려다 모든 게 헛꿈임을 알고 멈췄다. 무엇을 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다. 다른 시작점을 바꿀 길은 없다. 벌어진 간격을 좁힐 방법도. 스무 살의 그는 그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이별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숨을 골라 쉬고 그는 고개를 넘었다. 신호등 앞에서 봤을 때는 꽤 높은 언덕이라 생각했는데 몇 걸음 걷다 보니 언덕 위였다. 새로 지은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편의점과 피자집, 옷가게와 슈퍼, 치킨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번도 넘어보지 않은 동네에서 길을 잃겠다 작정하고 들어섰지만, 대로 곳곳에는 표지판이 매달려 있고 그는 아무것도 잃을 수 없었다. 두려움이 발치에 떨어졌고, 참았던 숨을 뿜었다. 이곳에서도 같은 바람 냄새가 났다. 생기 어린 온도. 볼을 데우고 가슴을 뛰게 하는 온도의 바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별 것 아닌 것, 어둠 뒤에 뭉쳐져 실체가 없던 것이 보였다. 치킨집, 편의점, 약국과 부동산, 옷가게와 슈퍼. 옷장 속 괴물처럼, 언덕 뒤 동네에는 무엇도 없었다.


'맥주 마실래? 한 시간 내로 도착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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