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정했던 나를 이해하게 된 날
‘양극성 정동 장애’
오늘 내가 받은 소견서에 적힌 나의 진단명이다. 나라에서 진행하는 <정신건강 심리 상담 바우처 사업>(2025년까지는 전국민 마음 투자 사업으로 진행되었다.)에 신청하기 위해서는 진료받고 있는 정신과의 소견서가 필요했다. 단순 우울증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뭔가 낯설고 이상한 존재로 낙인찍힌 느낌이었다. 그러나 섣부른 판단으로 자신을 오해하는 건 나의 우울 개선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집에 돌아온 나는 나의 챗GPT 뿡뿡이에게 ‘양극성 정동 장애’가 어떤 병인지 물어보았다.
나: 뿡뿡아, 양극성 정동 장애라는 게 있어?
뿡뿡이: 응, 양극성 장애의 스펙트럼 중 하나, 의학적으로는 순환성 기분장애(사이클로싸이미아, cyclothymia)라고 불려. 한 줄로 말하자면 조울증(양극성 장애) 보다 훨씬 가볍지만, 우울·기분 상승이 반복되는 상태야.
뿡뿡이의 말에 의하면, 양극성 I형, 양극성 II형, 그리고 순환성 기분장애가 있는데 내가 순환성 기분장애에 해당될 수 있다.
•양극성 I형: 확실하고 강한 조증을 띤다.
•양극성 II형: 경조증과 우울증이 같이 나타난다. 텐션이 과해질 수 있으며, 우울이 꽤 깊어질 수 있다.
•순환성 기분장애(양극성 정동 장애): 가벼운 경조증과 가벼운 우울증이 반복된다. 해당 증상은 기간이 길고 패턴이 잦다. 그래서 항상 불안정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혹시 내가 타인에게 이렇게 보이려나?
여기까지만 읽는데도 내 인생 난이도가 하드 단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꽤나 불안한 사람으로 보였을까?‘ 찝찝하고 심장 졸이는 감정이 느껴졌다. 그나마 강한 조증을 가진 양극성 I형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이런 나와 12년 가까이 사귀어준 남자친구와 19년 동안 지내준 친구들이 보살님처럼 느껴진다. 내 곁에 있어준 사람들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스친다.
과거를 되돌아보면 나는 두 번째 병원에서 ADHD 약을 처방받을 정도로 기분이 좋을 때는 과하게 의욕이 넘치고, 잠을 늦출 정도로 계획을 세우며 실행했다. 그러다 롤러코스터에서 갑자기 낮은 지점으로 확 떨어지는 것처럼 의욕이 꺾이고, 그저 눕고만 싶어지고, 별거 아닌 것에 심한 자책을 하기도 했다.
나: 나는 왜 이런 병을 얻게 된 걸까? 신경전달 물질 장애의 원인일까? 아니면 내가 살면서 겪는 경험으로 인한 걸까?
지금 원인을 안다고 해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원인을 제거할 수 없겠지만, 내가 겪는 병에 대해 이해하고 싶었는지 계속 물어보게 되었다.
뿡뿡이: 이건 하나의 원인으로 생긴 게 아니라 여러 개가 겹친 결과야. 세로토닌,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이 기분 조절 시스템이 가족력이나 태어날 때부터 영향으로 불안정하게 세팅된 사람들이 있어. 이런 건 성격이 아니라 뇌의 특성에 가까워.
그리고 어린 시절 직업 군인이었던 아버지에게 통제받았던 환경, 가세가 기울어져 불우했던 유년 시절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트리거가 되어 증상이 드러나기 쉬워지는 거지. 원인을 따지자면 너의 잘못은 1도 없어.
오해를 풀어보자면, 많은 사람들은 ’내가 강했으면 우울증 같은 건 안 걸릴 텐데‘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틀린 말이야. 양극성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참는 힘이 강했고, 버티는 기간이 길었고, 감정을 누르는데 익숙해졌어. 그래서 한계에 넘어서야 증상이 보이기 시작한 거야.
가끔 내가 우울증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고 있다고 하면 정신력으로 버티라고, 약 복용하면 끊지도 못한다며 나를 나약한 존재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뿡뿡이는 반대로 이미 나는 충분히 참을 만큼 강했다고 말해주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양극성 스펙트럼에 해당되는 건 복합적인 요인들로 내 뇌가 매우 예민한 상태인 거다. 이게 타고난 뇌의 세팅이라면 완치는 할 수 없어도 더 나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관리하면 인생 난이도가 하드 모드에서 중간 단계로 바뀌지 않을까.
나의 진단명이 적혀있는 소견서를 접어 병원 봉투에 넣는다. 단순 우울증이라 생각하고 시작된 나의 병이 점점 구체적으로 다듬어져 간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모르며 지나쳐 살아갈 수 있었는데, 용기 내어 병원을 간 것을 시작으로 내 뇌의 기분 조절 시스템이 불안정한 걸 인정하고, 사소한 것 하나에도 예민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런 나를 받아들이고, 우울한 나와 함께 예민한 나와도 같이 인생이라는 퀘스트를 풀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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