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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십편 Apr 15. 2023

공황장애

< 시댁과의 다툼, 그 후 2>  83년생의 집





나는 정신을 너무 부려 먹었던 걸까?



 세상을 살아갈 때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고, 돈 대신 몸으로 고생하자고 생각했다. 젊으니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계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열악해도 분수에 맞는 싼 집을 찾아다녔고, 이사할 땐 항상 남편과 나도 참여하는 반포장 이사로 비용을 덜었다. 도배 대신 셀프 페인팅으로 집을 손봤고, 두 번의 출산 모두 산후조리원엔 가지 않았다. 당시에는 산후조리원에 대해서는 바우처가 없어 200~300만 원의 목돈이 아까웠다. 금액 자체가 아깝기보다는 아기의 생애 첫 2주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가 않았다. 바로 옆에 함께 누워서 바라보고 싶었다. 그 돈은 한동안 왔다 갔다 고생해 주실 친정 엄마를 서유럽 여행 보내드리는 데에 썼고, 남편과 나는 1박 2일 병원에서 지내고 퇴원 후 아기를 안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산후도우미 이모님이 2주 출퇴근해 주셨다. 출산 때는 무통주사도 맞지 않았다.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연년생 둘째 때도 마찬가지였다.



차 없이 9년,  한 아기는 아기띠에, 한 아기는 손을 잡고 버스를 타고 소아과나 육아지원센터를 다녔다. 이동이 쉽지 않아도 자연과 친한 아이들로 키우고 싶어 아기 때부터 일주일에 두 번은 아기를 안거나 쌍둥이용 경량 유모차를 끌고 산으로 향했다. 북한산 둘레길의 무장애 탐방로를 이용했다. 언덕길에서 두 아이가 앉은 유모차를 밀다가 헉헉 숨이 차고 땀이나 잠시 멈추면,  두 딸이 힘내라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동요로 된 노동가였다. 그렇게 셋이 신나게 웃으며 산으로 달려갔다.  


남편이 출근한 평일에 혼자 기차와 고속버스를 갈아타며 연년생 어린이들을 데리고 동해도 가고 남해도 갔다. 바다에 퐁당 젖으면 두 아이와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던 동네 분들이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주어 모래를 털게 해주셨다. 어딜 가나 동네 어르신들은 객지에서 온 아이들이 고생하는 건 차마 못 보겠다는 듯이 친절을 베풀어주셨다. 아이들은 그렇게 엄마 이외의 큰 어른들의 따뜻함을 배워갔다.  


네 살까지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숲 육아, 책육아를 한다고 노력했다. 책육아를 한다고 전집 회사에 들어가 돈을 벌면서 전집을 읽혔다. (영업이 쉽지 않아 책값만큼만 번 듯, 남는 게 없었다.)



TV 없이 10여 년, 언제까지나 대화하는 부부로 살자고 약속하며 결혼할 때 처음부터 TV도 사지 않았다. 내가 드라마와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TV에 끌려다닐 게 빤히 보여 싫었다. 자연스럽게 아이들도 TV 없이 컸다. 정신적으로, 정신적으로, 정신적으로 늘 깨어있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술도 마시지 않기에 무엇으로 느슨해져야 할지 어디에서 쉼을 얻어야 할지는 잘 몰랐다. 그놈의 정신이 너무나 고단하고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던 어느 날에



 






정신이 덜컥 고장이 났다.





 아가씨가 운전하는 소형차에 남편, 어머니, 나, 두 아이가 끼여 앉은 겨울날이었다. 남편과 아가씨가 운전석과 조수석에 있고, 약간 몸집이 있으신 어머니와 내가 뒤에서 아이를 각각 무릎에 앉힌 상태였다. 잠깐의 이동거리라 억지로 탔는데, 아이들이 답답했는지 울면서 보채기 시작했다. 특히 까다로운 첫째가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 내 목을 콱 조르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몸부림을 친다, 저 정도 짜증은 20분짜리 짜증이다. 어쩌지?  공간이 너무 좁다. 도로 중앙에 있어서 차를 세울 수도 없다. 내가 무엇을 손 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 상황을 어떻게 통제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좁아서 옷들이 몸을 옭아매는 것 같다. 답답하다.'  



이 생각이 드는 순간 온몸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너무 좁은 와중에 어머니 잠깐만요, 하면서 내가 안고 있던 아이를 어머니 옆으로 앉혀 놓고, 순식간에 스카프를 풀고, 외투를 벗고, 스타킹도 벗었다. 그러고도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아가씨에게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한 겨울인데 그 상태로 몸만 뛰어내렸다. 차가 오래 정차할 수 없어 일단 출발을 했는데, 차에 벗어 놓고 내린 외투 주머니에 지갑과 핸드폰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람은 쌩쌩 불고, 맨다리에 외투도 없이 길에 멍하게 서있었다.



애초 시작부터 함께 한 빚을 배수의 진처럼 안고, 한 걸음 뒤로 잘못 디디면 벼랑에서 떨어진다는 생각으로 살았던 시간이 힘들었었나 보다. 두 아이가 쑥쑥 클수록 절약이 내 뜻대로 되지가 않았다. 생각하고 계획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든 상황이 내 머리 꼭대기가 아니라 저 멀리 시그니엘 꼭대기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게 버겁고, 내 통제 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황장애, 폐소공포



 어린이 전집 회사에서 영업을 할 때였는데, 본사에서 교육을 받고 지점으로 돌아갈 때였다. 팀장님이랑 직원들이 한 차에 타고 가자고 했는데 나는 내 증상을 알아서 거절했다. 극구  거절했다. 하지만 한 사람이 "그거 다 의지의 문제야. 꽃님아. 다 마음먹기에 달렸어. 극복해! 이겨내!"라고 하면서 팔을 잡아끌었고,  얼결에 차에 탔다. 가장 친한 친구 중에 한 명이었고 그 친구를 따라서 전집 회사에 입사했는데 그런 말을 해서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저 말은 아픈 사람에 대한 이해가 없는 말이다.)



차가 출발했다.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썼지만, 차가 곧 내부순환로에 오른다는 생각만이 가득 다. 도시화 고속도로에 들어가면 일반 도로와 달 급한 상황이 생겨도 내릴 수가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더 심각하다고 생각했던 건, 내부순환로가 끝이 아니라 동부간선도로로 이어져 동부간선을 타고도 한참을 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예기불안으로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빨리 뛰어서 시선이 초점을 잃기 시작했다. 운전하고 있는 선생님한테 갓길에 내려달라고 사정했다. 내가 내릴 때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 친구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혼자 내리려고 했는데, 나보다 어린 여자 팀장님이 급하게 나를 따라 내렸다. 그 친구는 그저 쳐다보다가 차에 탄 채로 붕 가버렸다.



내리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바로 옆에 쌩쌩 달리는 차들 때문에 더 어지러웠다. 팀장님도 위험했고, 가드레일을 넘어서 섬처럼 조성된 잔디 위로 올라갔다. 그 경사 위 역시 도로였다. 심장은 터질 것 같고 숨도 잘 안 쉬어졌다. 119에 전화했다. 용비교 아래였다. 구급대원들이 와서 맥박을 재고 빈맥이라고 하셨다. 차에 타라고 했지만 창문이 모두 밀폐된 실내를 보자 발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딱 5분."



사이렌을 울리고 가면 5분 안에 고속도로를 벗어난다는 생각만을 했다. 어린 팀장님은 옆에서 "꽃님선생님, 이제 멀리 출구가 보여요." "거의 출구에 다 왔어요." "이제 일반도로예요."라고 계속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게 함께 응급실에 가주었고, 병원을 나와서 한참을 함께 걸어주었다.  

 




증상은 폐소 공포였다. 처음엔 지인 추천해 준 병원을 몇 달 다녔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걱정을 많이 하셨던 시아버지께서 사촌고모님께 나를 부탁하셨다. 시고모님께서 운영하는 신경정신과에 가서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며 펑펑 울었다.



 

한동안 나을 기미가 없었다. 약을 먹으면 멍하고 차분해졌지만, 차나 엘리베이터에 타야 할 상황이 오면 견딜 수 없었다. 상태가 악화됐을 땐 버스가 인도 쪽이 아니라 중앙선 쪽으로 붙었을 때도 공포를 느껴서 바로 내린 적도 있었다. 2분 간격으로 내릴 수 있는 지하철 외에는 탈 수 있는 게 없었다. 친했던 친구처럼 주위 사람들은 공황을 이해할 수 없는 눈초리로 바라봤다.




보통 때는 멀쩡하다가 특정한 상황에서만, 차를 탈 때도 거리에 따라 혹는 앉는 자리에 따라 된다 안된다 하니 아파보이지가 않아 보였나보다.  마치 어딘가 가기 싫을 때 하는 '선택적 변명'처럼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가끔은 내가 공황장애 핑계를 대는 건가? 하는 물음을 던지기도 했다. 그래도 고모님의 병원을 다니면서 차츰 마음이 안정되어 갔다. 내가 직접 안심이 되는 길로 운전을 하면서 다니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남편 친구 중에 오래 탄 차를 처분하려던 친구가 있어서 저렴하게 중고차를 갖게 되었다. 결혼 전 직장에 다닐 때 외근이 많아서 서울, 경기, 강원권까지 내게 지급된 전용 회사차를 운전해 일하러 다녔었기에 운전이 편했다. 고속화도로는 무조건 피하고 언제든 힘들 땐 내 뜻대로 멈추고 내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드는 일반 도로로만 다녔다. 그렇게 차에 익숙해지자, 조금씩 조금씩 차에대한 거부감이 다시 사라져갔다.




선생님과의 편안한 대화, 약물치료, 위험한 상황은 미리 피하는 것으로 증상이 거의 사라져가는 와중에 내가 커다란 사고를 치게 되는데, 그 사고와 함께 찾아온 깨달음, 후련함 같은 것들이 정신을 옭아매던 틀을 깨어주었다. 영혼이 자유로워진 것 같은 기분... 그리고 완치가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4년 동안 먹던 약을 멈춘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다음에 쓸 사고친 이야기, 코인 빚투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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