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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십편 Apr 11. 2023

시댁과의 다툼, 그 후 1

< 시댁과의 인연을 끊을 수 있을까?>  83년생의 집





시댁과의 다툼 후에 이사한 독산동 다가구 주택에서의 전셋집 살이는 여러모로 열악해서 고달팠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우리는 미뤘던 혼신고를 했고, 산전 검사 등을 하며 임신 준비도 했다. 한때 파혼까지 상상했던 내가 마음의 안정을 찾고 오히려 둥지를 틀게 된 건, 주거 환경 때문이 아니었다. 남편에 대한 신뢰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당분간 본가랑 인연을 끊고 살게."



불안해하고 괴로워하는 나에게 남편은 이런 약속을 했고 시부모님께도 그렇게 전달하더니 정말 부모님과 연락하지 않게 되었다. 당시에 보았던 '화차'라는 영화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시아버지께서 계속해서 빚을 만들고 우리에게 떠넘기실까봐 두렵고 모든 관계가 지긋지긋했던 나는 부모님 보다 내가 중요하다며 나를 택한 그 모습에 안심이 되고 신뢰가 생겼다. 물론 모두에게 슬픈 일이었다.




아직 신혼이지만, 함께 웃어도 무얼 해도 우리의 웃음 뒤엔 씁쓸함 같은 것이 있었다. 서로 말을 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래도 솔직한 나의 마음은 아픔을 감내하고 나를 안심시켜 주려던 남편에 대한 '고마움'이 제일 컸다.




친정 부모님은 첫 번째로 '시댁 빚 사건'때문에 가슴이 미어지셨었고, 두 번째로는 시부모님과 인연을 끊겠다는 천인공노할 며느리가 바로 본인의 딸이라는 사실에 기함을 하셨다. 전화를 할 때마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이제는 연락드려라.' '연락은 했냐' '시부모님께 연락드리기 전엔 나랑도 연락할 생각을 말아라.'라는 내용의 모진 말들을 하셨다.





상처를 받은 건 나와 남편인데, 우리 둘 말고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몹시 외로웠다. 그런데 나보다 남편이 더 외로워 보였다.




그렇게 시댁과 인연을 끊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인터넷에 이렇게도 저렇게도 검색해 보았던 날들이 있었다. 시댁과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핏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이 되는 해결책인 것 같아 보이지만, 막상 그 죄책감의 무게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글을 검색해 보면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고통스럽고 억울은 한데 정말로 인연을 끊고 사는 게 쉽지 않으니 누군가 같은 입장인 사람이 없는지 찾게 되는 것. 누군가에게 괜찮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결국 글을 쓰고 보는 모두가 불행해 보였다.




그렇게 시댁과의 다툼으로부터 멀어져서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보였다. 첫 아기였다. 설레고 떨리는 기쁨의 순간이었다. 남편과 친정 부모님께 소식을 전한 하루, 침대에 기대앉아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나를 이토록 사랑해 주는 남편을 나는 사랑하고, 남편은 부모님을 사랑한다. 부모님께 기쁜 소식을 알릴 수가 없고 벅찬 마음을 공유할 수 없는 남편은 얼마나 슬플까. 생각이 길어지면 망설이게 될 것 같아서, 어머니께 만나 뵙고 싶다고 문자를 드렸다.




몇 개월 만에 커피숍에 어머니와 마주 앉았다. 어머니 입장에선  남편(시아버님)이 일방적으로 한 일 때문에 어머니도 속상하셨을 텐데 새로 맞은 며느리와 얼굴을 붉히고, 아들 얼굴까지 못 보게 되셨으니 그 마음이 어떠셨을까 하는 생각이 (그동안 안 한 건 아니었지만) 치밀어 오르며 눈물이 났다.



"어머니, 죄송해요."


"꽃님아, 아니야. 내가 미안하지... 내가 너무 미안했어."



그간 어떻게 지내셨는지도 여쭤보고, 독산동에 값싼 전세를 얻어 이사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시계를 보았다. 이제 남편이 올 시간. 남편은 어머니가 계신 줄은 모르고, 그저 나를 만난다고 알고 달려오고 있었다. '꽃님아, 어디야 나 도착했어.'라는 문자와 함께 내가 뒤를 돌아보았고 어머니도 뒤를 돌아보셨고, 남편은 어머니를 발견하고 눈이 잠시 커졌다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엄마!" 담담한 듯한 얼굴이었지만 마음을 감추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 저희 이사한 집에 놀러 오세요."  이런 대화를 하며 기분 좋게 헤어졌다.



임신이 안정된 시기에 접어들고는 시부모님께도 소식을 전해드렸다. 시댁은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첫째의 태명은 별이였는데 아직 하리보 젤리 크기도 안 된 별이를 연신 이야기하셨고, 설레어 하기는 아가씨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부터 사야 할까, 남자 아기일까 여자 아기일까.




그사이 아가씨는 공기업 두 곳에 합격했는데 한 곳은 전체 2등으로 합격했다고 했다. 공기업 둘 중 한 곳을 골라가게 되었다고. 아가씨는 나에게 "언니, 우리 집은 이제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책임질 거니까 이혼만 하지 말고 잘 살아줘요."라고 말했다. 시어머니께서는 "내가 죽는 날까지 꽃님이 너를 아껴줄게."라고 하셨다.




그렇게 한동안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듯했다. 하지만 여느 며느리의 일으로 돌아가서 생신, 어버이날, 명절, 제사를 챙기게 되자 나의 마음도 그저 여느 며느리로 복귀를 해버렸다. 게다가 첫아기가 태어나고, 연년생 둘째가 또 태어나고, 일은 그만두어 남편의 외벌이로 살림을 꾸리는 게 굉장히 벅찼다. 무엇보다 이사를 할 때마다 마치 장기자랑 하듯 특징을 뽐내는 남의 집들은 아파트에서만 편하게 자란 나에게 아주 징글징글했다.



보일러와 곰팡이가 번갈아 문제였던 다가구 주택, 빌라 전체에 환기가 될 통로라곤 굴뚝에 얼굴하나 크기로 뚫린 구멍 하나 밖에 없었던 빌라에선 첫 째가 태어났다. 이 빌라는 온갖 연기가 계단에 꽉 차있었고, 특히나 담배 연기가 우리 집 화장실에서 직접 피는 것처럼 올라와서 갓 태어난 아기 걱정에 사비로 화장실 환풍기 설치 공사를 하기도 했었다. 천장엔 쥐와 고양이가 뛰어다니는 소리도 들렸다. (믿기 힘들겠지만 그 지붕은 그랬다.) 그런 환경 속에서 화가 날 때마다, 우울할 때마다 나는 시부모님을 원망했다. 



"우리가 안 그래도 힘들게 시작하는데 오빠네 빚까지 갚아드려서, 어?"



사는 게 벅차다고 아무나 붙잡고 울고 싶은 내가 이렇게 말하면 남편은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기분이 좋을 때는 친정 자랑을 했고 사는 게 힘들어 모든 게 원망스러울 땐 시부모님을 원망하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저렇게 잘해보려고 하는 현명한 여자',라는 혼자만의 망상이 있었고 그런 신념으로 남편을 대했으니 대기업 연구원인 공부 많이 한 남편도 내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마저 든다. (INFP라 자아비판의 강도가 많이 쎈)  

 



어느 사이 나에겐 마음의 병인 공황증이 찾아왔고, 마냥 낙천적이고 한 없이 따뜻하고 밝았던 남편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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