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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십편 Apr 05. 2023

결혼할 사람이라는 느낌이 온 순간 2

< 단 이틀의 스침 > 83년생의 집






빗자루를 든 싱거운 남자



그날은 어느 전자 대리점에 단 이틀, 파견 근무를 나간 날이었다. 그곳 직원들에게 우리 제품 좀 많이 판매해 달라고 제품 교육도 하고 시연 행사도 하는 날.



그날따라 매장에 고객은 없고, 판매 직원들만 여럿 있었다. 한가한 매장 안에 시연대에서 피어나는 달달한 약밥 냄새가 퍼져나갔이끌리듯 시연대로 직원들이 찾아왔다. 근무 중이니 교대로 왔다 갔다 하며 짧고 즐거운 한두 마디를 주고받았다. 영업사원답게 센스 있고 유쾌한 말들을 해주고 가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나보다 더 즐거운 이는 해당 매장에 상주하고 계신 우리 브랜드 여사님이었다. 남자 직원들만 많은 곳에서 혼자 외로운 싸움을 하고 계셨던 우리 여사님. 내가 그날만큼은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한 남자 직원이 다가와서 내게

"혹시 남자친구 있어요?" 하고 물어보기에


네~!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여사님이 내 옆구리를 쿡 찌르시며 "남자 친구 없대요~"라고 하신 것이었다. 잦은 헤어짐으로 끝이 보이는 사이이긴 했지만 어쨌든 남자친구가 있는 상황에서. 나는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사람이 가고 나서 여사님은 내게 작게 속삭이셨다.


"여기 직원들한테 좋게 보이면 우리 밥솥 밀어줄 테니까~ 이틀만 남자친구 없다고 거짓말해줘요~"


"네..!"



그렇게 그 매장에 내게 남자친구가 없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나의 모는 평범하고 흔하디 흔한 흔녀였지만, 인간은 상대적 존재이기에 비교 대상이 없는 홍일점 상황에서의 인기는 공대 아름이 같은 것이었다. 와서 자꾸 말을 시키는 직원도 있었고, '제 친구 소개팅해 드릴게요.' 하면서 전화번호를 받아 간 직원도 두 명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이때 내가 남자친구가 있다고 대답했으면, 지금의 남편을 못 만났을 거다.



어쨌든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어깨를 똑바로 펴고 배에 힘을 딱 주고, 예쁘게 걸으려고 노력하게 되면서도 입꼬리는 좀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는 그런 상황!



그런 상황 속에서 이상한 직원이 눈에 띄었다. 자꾸 성큼성큼 와서 미니 컵에 든 약밥을 한 입에 털어 넣고 빙긋 웃으면서 "약밥이 참 맛있네요!"라는 싱거운 한 마디만 하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사라지는 남자. 전자제품을 판매하고 있는 다른 직원들과 달리 빗자루와 쓰레받를 들고 내 앞을 왔다 갔다 하는 남자. 어깨에는 '친절히 모시겠습니다.'라는 띠가 둘러져 있었다. 뭐 하는 사람인가... 왜 하루 종일 청소만 하나. 궁금하던 찰나에 남자가 다가왔다.



"물건 가지러 창 다녀오시려고요? 제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나한테 관심이 있나? 어머. 내심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몇 시간 후에 그 할머니 고객께 클레임 전화가 왔다.



<아가씨, 내가 6인용을 샀는데, 뜯어보니 10인용이야>  




무거운 제품을 들고 오실 할머니가 걱정이 되어, 사고를 친 어리버리한 그 남자 직원과 제품을 들고 근처로 나갔다. 남자 직원 어쩔 줄을 모르며 내게 말했다.


"상자가 개봉 돼서 어쩌죠... 죄송합니다. 제가 밥 한 번 사드릴게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마지막 날 알게 된 사실, 이 남자는 이 매장의 판매 사원이 아니고 본사의 신입사원이었다. 그 주에 '신입사원 현장 체험 연수'를 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었다.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것도 같았는데 다른 직원들과 달리 전화번호를 묻지 않았다. 그렇게 이틀간의 지원이 끝나고 내가 먼저 그 매장을 떠났다.



그런데 며칠 후, 전화번호를 묻지 않았던 이 남자에게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저 물건을 잘못 꺼내드렸던 꽃돌이입니다. OO 씨에게 전화번호 물어봐서 연락드립니다. 죄송하니 제가 밥 한 번 살게요!"




아직 남자친구와 헤어지지 않은 상태인 나는 거절했고, 그 후로 연락이 오지 않았다.









종소리



얼마 후, 그 싱거운 남자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이 남자는 문자도 싱거워서 '날씨가 좋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는 말만 번갈아 매일 반복했다. 딱 한 번 본 사이에 뭐라고 답장을 해야 할지도 난감했다. 그나마 날씨에 대한 안부뿐인 와중에 남자가 비가 온다고 우산을 챙기라고 한 날은 맑았고, 날이 좋다고 하는 날엔 비가 왔다. 그래도 이때는 예전 남자친구와 헤어진 때라 허전하기도 했고,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해서 신촌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2022년 여름에 찍은 홍익문고 //  글 내용은 2010년 시점




조금 일찍 도착한 나는 신촌역에 있는 홍익문고에 들어가서 책을 읽고 있었다. <담배 한 개비의 시간>이라는 책을 보자 예전에 헤어진 첫사랑 생각이 났다.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서로 기다리고 지쳐가다가 헤어진 첫사랑. 그 친구가 담배를 그렇게 피워댔었는데. 그렇게 좋아했어도 결혼할 사이는 아니었던 거였어라는 생각을 하며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씁쓸하고 쓸쓸한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때였다.




"잘그랑~"




하고 종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걸 종소리라고 생각했다. 서점 문에 달린 '종'이었거나 '풍경' 아니었을까. 잘그랑하는 종소리에 책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문쪽을 쳐다보았는데, 투명한 유리문으로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며 그 남자, 남편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뛰고 간지러운 것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다음부턴 운명의 벚꽃 섬을 향해 다가가는 로맨틱한 배에 탄 기분으로 함께 걸어 다녔던 것 같다. (군산에 배를 타고 갈 때 하얗게 다가오던 벚꽃 섬이 생각났다.) 신촌 맛집이라는 파스타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이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해도 좋게 들릴 것 같아서, 이 사람이 부디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는 보통 회사의 연구원이었다. 내 눈이 반짝했던 부분은, 본인이 해병대를 나왔다고 스치듯 얘기했을 때였다. 이게 중요했던 이유! 약밥을 먹을 때 그저 빙글빙글 웃기만 하고, 계속 사람 좋게 웃으며 빗자루질, 걸레질시키는 대로 묵묵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착하긴 한데, 저렇게 사람이 순하기만 하면 어떡하나... 울 아빠를 보는 것 같아서 걱정스러운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해병대면 강한 훈련도 견딘 악착같은 사람이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에 갑자기 사람이 힘을 감춘 듯 겸손하고 든든해 보였다. (한참 나중에 알고 보니 행정병이라 해병대 훈련은 거의 안 했다는 반전....)






그리고 지금보다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의기양양했던 나는 마주 앉은 남자에게



"저는 반드시 꼭,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작가가 될 거예요. 그게 내 꿈이에요."라는 식의 말을 확신 있게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글은 후에 나온 내 인생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나의 아저씨> 같은 류의 글이었다. 어렴풋이 그런 따뜻하고 재치 있고, 감동적이고 위안이 되면서 사랑스러운 작품을 머릿속에 상상하면서 한참 내 얘기를 했는데,  남편은 바보처럼 입을 벌린 채로 멍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당황스러워서,



"저... 얘기 끝나는데요, 왜 입을 벌리고 계세요.." 했다.


"아, 예! 멋있으셔서요." 하면서 입을 닫았던 남편!




그때가 2010년.. 지금은 2023년. 난 아직도 꿈에만 머물러 있고 그럼에도 한결같이 나를 대하는 남편에게 그저 미안한 마음이다. 내가 성공해서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했는데, 이리저리 세상 풍파에 함께 흔들리면서 붙잡고 있는 건 남편의 다 굳어버린 어깨뿐이니......



어제저녁 식사 자리에서 남편에게 "오빠는 언제 나랑 결혼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하니



"처음 봤을 때 걸어가는 뒷모습 보고"란다.


엥? 갑자기 얼굴이 빨개졌다. 지금 사춘기가 올락 말락 하는 짓궂은 열 살, 첫째 딸이 아빠를 놀렸다.


"아니 아빠, 뒷모습? 엉덩이를 보고 반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러자 남편도 억울해하고 당황하며 부연 설명을 했다.  


"엄마 걸음걸이가 착해 보였어..! 약간 손을 펭귄처럼 흔들면서 깡충거리면서 걸어 다녔거든."


생각이 났다. 그 무렵 마트나 매장을 돌아다닐 때, 오래 서있는 게 힘들 때면 속으로 여기가 나의 종착지가 아니야, 나는 작가가 될 거야, 힘을 내야 해 힘을!이라고 외치며 (정말로)


"씩씩하게! 씩씩하게!"라고 나만 들리게 구호를 외치며 뛰어다니듯이 걸어 다녔던 게..


  


남편이 아녔으면 누가 내 이상한 걸음걸이를 보고 좋다고 해줬을까 싶다. 자기는 선의의 거짓말도 하지 않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며 한결같이 정직한 모습으로 내 손을 잡고 있는 그 사람과의 첫 만남이 떠오르는, 비 오는 날이다. 나도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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