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지긋한 집에 비해 나는 의지가 넘쳐나는 '새댁'이었다. 겉은 누추해도 안은 깔끔하게, 밖이 아무리 추워도 집 안은 따뜻하게!
'어쩔 수 없이 낡은 집으로 왔지만, 안의 환경만큼은 내 뜻대로 하겠어.'
그렇게 혈기가 넘쳐 셀프 페인팅을 하고, 실리콘들을 새로 쏘고, 뽁뽁이를 구해다가 창에 붙였다. 혼자서 낑낑대며 뽁뽁이로 창문들을 도배하고 밤에 잠자리에 누웠는데, 약이 올랐다. 서늘한 바람이 너무 자유롭게 나의 이마와 발끝을 스치며 지나다니는 것이었다. 웃풍은 뽁뽁이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다음 날엔 환기의 불편함을 무릅쓰고 뽁뽁이가 붙은 창 위를 방풍 비닐로 한 번 아예 덮어버렸다. 성공이었다. 낮에는 커다란 창에 해가 들었고 밤이 되면 힘들게 얻게 된 새 보일러의 온도를 높였다. 제법 아늑하고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이제 자리가 잡혔다는 마음에 친정식구들을 초대하고, 시댁식구들도 초대하고... 친정 식구들은 나보고 극성스럽다고 했고 시댁 식구들은 어쩜 이리 깔끔하게 바꾸었냐고 감탄을 하셨다. 아주 흐뭇했다.
그런데 어느 날 삐져나온 침대 커버를 정리하느라 침대가 닿아 있는 벽 쪽에 뺨을 대고 있는데, 노란 벽지에 피어오른 검은 얼룩을 발견했다. 곰팡이!
헉.
이때 나이 서른. 그때까지 벽지에 핀 곰팡이는 본 적이 없었다. 첫 조우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보이지 않는 곳에 본진이 있을 거라는 상상도 이 땐 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혼자 낑낑대며 침대를 뒤로 확 뺀 뒤에 깜짝 놀라 주저앉았다.
한 줄기 폭포가 흘러내려 밑에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고 있는 절경... 같은 형상을 한 곰팡이가 있었다.
내가 서부를 개척한 무법자처럼 승리에 도취되어 있는 새에 이런 것이 페인팅 한 벽지를 망치고 있었다니. 그보다 여기가 머리맡인데 곰팡이 옆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모를 땐 몰라도 1분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 화장실 곰팡이에 뿌리려고 샀던 분사형 곰팡이 제거제가 있었다.
보일러와 전쟁을 치르고 마음이 편안해지려는 찰나에 마주한 곰팡이는, 인생은 허들 넘기 경기처럼 계속 헐떡 거려야 하는 것인가 생각하게 만들었다. 특히 걸레받이가 없이 장판이 10cm 정도 올라와 있는 벽과 장판 사이를 열었을 때 손이 후들거렸다. 장판과 벽지가 맞닿아 있는 곳이 다 곰팡이였다.
곰팡이 제거제의 공격적인 거품이 소란스럽게 보글거리다가 곰팡이의 죽음과 함께 잦아들어가는 벽지를 두 손으로 박박 닦았다. 엄마 아빠랑 살 때가 편했구나...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데 그 집은 친정을 말하는 건가? 여기도 집인데 왜 이러는 거야. 생각하며. 그렇게 곰팡이 제거를 마무리 지었다. (물론 방풍 비닐 다 뜯고 열심히 말렸다.)
얼마 후 위층 주인 어르신 집에 들어갈 일이 있었는데, 창가 쪽 벽지에 신문지가 좌르륵 붙어 있는 것이 눈에 확 띄었다. 신문지들은 약간 젖어 있었다. 방풍비닐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우리 집만 그런 것이 아니었던 거다.
너무 큰 온도차와 자본이 비어 있는 허술한 벽 하나는 곰팡이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또 얼마 후엔, 바로 밑층인 지하에 살고 계신 할머니 댁에 우리 집 보일러의 누수로 인한 침수가 발생했다. 폐지를 주워 생활하시는 할머니께서 살고 계셨는데 너무 죄송했다. 보일러 기사님이 오셨고, 안 그래도 비좁은 집에 남자분이 커다란 망치를 들고 드나드니 불편하고 무서웠다. 바닥을 깨부수고 파헤쳤는데, 한 번에 찾지 못해서 두 곳에 구멍이 나버렸다. 회사에서 돌아온 남편과 허탈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정신이 똑바르고 직업이 있고, 서로 사랑한다면 시작할 때 돈이 없어도 차근차근 굳세게 살아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새댁은... 그 믿음을 꺾은 적이 아직 없지만, 사실 이때부터 이미 무지 많이 지쳐버린 것 같다. 아침이 밝아오면 새로운 일들이 터지는, 불안한 행복 속을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