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십편 May 12. 2023

운명의 집과 세 분의 부동산 사장님 1

< 잊지 못할 그 분들 > 83년생의 집



내겐 네 번째 집과 다섯 번째 집(지금의 집)에 얽힌, 잊지 못할 세 분의 부동산 사장님이 있다.




(개인적인 체험일 뿐, 직업 전체에 대한 의견이 아닙니다. 상호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빵 이름을 썼습니다.)





1. 마카롱 부동산



세 번째 빌라에서 갑작스러운 월세 전환 알림을 받고 만삭의 몸으로 인근 지역의 부동산을 돌아다녔다.


"전세는 지금 없어요. 하나도 없어요, 정말."


다 같은 답이었다. 어차피 매물을 전산으로 공유하시는 것 같은데 내가 발품을 파는 게 의미가 있나 싶었다.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에 길 옆의 한 부동산에 들어갔다. 사장님이 고개를 내젓다가 전화를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마카롱 사장님. 여기 콩고물 부동산입니다.... "



통화 끝에 콩고물 사장님께서 윙크를 찡긋해주셨다. "가시죠!"  

마침 지도에 짚어주신 위치가 친정에서 정말 가까운 곳이었다. '아 다행이다, 제발!' 콩고물 사장님과 나는 함께 마카롱 부동산으로 향했다.



마카롱 부동산에는 여자 사장님이 계셨다.



마카롱 사장님은 내 배를 보면서 "어머~~~! 곧 출산인데 어떡해요~? 빨리 집을 구해드려야겠네~~!"

능숙하고 친절한 말투로 말했다.


마카롱 : 잘 됐네, 마침 물건이 있으니 저랑 같이 가요.


나: 사장님, 전세 맞아요? 다들 전산에 없다고 하시던데요.


마카롱: 동네분들이 특별히 맡기는 건 제가 따로 관리해요. 무조건 전산에 올리는 건 아니거든요. 전세도 있어요.... 일단 같이 가보세요."



마카롱 사장님이 데려간 집들은 정말 우울했다. 요 며칠 동안은 아예 물건이 없어서 애가 탔는데, 막상 물건들을 보니 그동안 이사 다닐때 마다 느꼈던 감정이 또 북받쳐 올랐다. 하지만 뱃속에 아가가 있으니 침착하게 표정을 감추었다. 마카롱 사장님은 대화를 할 때마다 내 표정을 살폈다.



마카롱: 애기 엄마~ 하나가 더 있긴 한데...... 전세가 아니라 매매라. 근데 매매가 전세 가격이랑 똑같아요.


나: 네 일단 볼게요  (체념)



앞의 집들이 잔상으로 남아 마음이 우울한 상태로, 마지막 집의 문턱을 넘는 순간 안도의 숨이 내쉬어졌다. 그날 본 집들 중에 가장 깨끗하고 나은 집이었다. 해는 이미 넘어갔지만 안방 창으로 환한 빛이 들고 있었다. 직전에 어두운 집들만 보아서 그런지 이 집 안방이 그렇게 밝아 보였다.



나: 남향인가... 여기 밝네요?

마카롱: 남향은 아닌데 트여 있어서 밝죠~ 여기 다 낮은 빌라들만 있으니까.


마음에 들어 하는 내 표정을 살피면서



마카롱: 아까 그 (어두운) 집들이 1억 5천, 여기는 1억 4천이에요.



'싫은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살 생각도 없었는데다가 처음 사는 집을 이렇게 떠밀리듯이 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배는 무겁고 이제 아프고, 저녁 어스름은 깔리기 시작했고, 직전에 보여준 집들은 정말 우울했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다시 마카롱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도착하자마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직원이 말했다.   



직원: 마카롱 사장님, 이따가 아까 그 젊은 신혼부부가 계약하러 온대요.


!!!


이 홈쇼핑 완판 예고 같은 뻔한 말에 나는 왜 정신이 나갔을까. 


평소에 작은 물건 하나도 꼼꼼히 샀었는데, 나름 야무지다 소리 들어서 가족 친척들 물건들 구매 대행도 많이 하던 나였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가계약금을 걸고 돌아갔다. 심지어 직접 등기부등본도 어보지 않고(물론 사장님이 서류를 쓱 보여주긴 했었다), 그냥 1억 4천을 수긍해버린 것이었다. 갑자기 매매로.



물론 마카롱 사장님은 그저 '수완이 좋은 사업가' 일뿐 잘 못이 없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실수'였다.



새들도 둥지가 있어야 알을 낳으려고 시도하는데, 나는 출산 직전에 집을 비워야 해서 너무 다급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본 계약에서야 이 빌라의 원래 가격이 1억 2천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미리 알았대도 다급한 내 눈빛에 사장님은 1억 4천을 제시했을 게 분명하다. 나는 마찬가지로 거절을 못 했을 것 같고.



속상했던 건, 우리에게 집을 매도하는 분들이 우리랑 잔금을 치르는 과정에서 마카롱 사장님을 격하게 껴안고, 속닥거리고, 축제 분위기였다는 것. 오래 안 팔리던 빌라를 그것도 살 때 보다 가격을 올려서 팔아 그런지 기쁨을 감추지를 못하는 모습이었다. 



퇴근이 늦을 남편 대신 본 계약에 동행해 준 친정 엄마가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내게 귓속말로



"네가 정신이 없는데 나라도 옆에서 천천히 하라고 말려줄 걸 그랬나 보다."라고 말씀하셨다.



기분이 너무나 좋았던 매도인 아주머니는 내게 "애기 엄마, 거기 수도꼭지에 물이 똑똑 새는 부분이 있을 거야. 그거 남자가 손아귀로 꽉 잠그면 잠기지만 내가 5만 원 줄게~"라고 하면서 용돈처럼 5만 원을 테이블 위로 건넸다. 몇 초의 망설임. 안 받고 싶었지만, 손이 쓱 나갔다. 그때의 그 이상한 기분. 더운 것과 찬 것이 뭉근하게 섞이면서 몸속을 감도는 것 같은 멀미 나는 기분. 지금도 모양 빠지는 이 부분을 쓰는 게 싫다.


옆에 있던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정말 갑자기 사게 된 그 집



 

2. 공갈빵 부동산


그렇게 얼결에 사게 된 네 번째 빌라. 이곳에서 아이들이 6세, 7세가 될 때까지 대략 5년을 살았다. 이 시기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다녔는데, 산 초입에 있는 어린이집이라 통학버스를 타야 했다.   


우리의 통학버스 정류소는 바로 공갈빵 부동산 앞. 


나와 두 딸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놀이터에서 5분 정도 놀다가 좁은 길을 건너 공갈빵 부동산 앞에서 통학버스를 기다렸다.



공갈빵 부동산 사장님이 일찍 나오실 때면 우리는 밝게 인사드렸다. 나이가 지긋해서 머리가 희끗하신 할아버지 사장님이었다. 공갈빵 사장님에게도 손주가 있어서, 보고 싶은 손주들을 보는 다정한 눈빛으로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셨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면 다 내 손주 같아 보이는 그런 마음을 알기에 (내가 엄마가 되었을 때처럼) 따뜻한 시선이 감사했다.



그런데 어느 날, 서 있는 내 옆에 오시더니


"자네, 우리 제수씨를 정말 많이 닮았어."라고 하셨다.


"아.. 네"


내가 아는 사람을 닮았다고 하시면 공감을 하며 대답을 할 수 있을 텐데 그 제수씨라는 분이 어떻게 생긴 분인 줄 모르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짧은 대답만을 하고 앞을 보고 있으니 어색했다.



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우리가 서있으면 옆에 나와 함께 서있으며 제수씨를 닮았다고 말씀하시던 어느 날, 핸드폰을 들어 본인의 손주 사진을 보여주시다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셨다. 너무 기분이 나빴다. 옆으로 비켜서 거리를 두는 찰나에 통학 차량이 도착해서 아이들을 올려보내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에 있을 때에도 종종 서서 지켜보던 분이, 누구를 닮았네 하며 빤히 쳐다보시고 어깨에 손까지 올리니 그동안 선을 넘을 듯 말 듯 했던 애매함이 불쾌함으로 확실하게 다가왔다.



남편에게 말을 하고, 어린이집에 전화해 양해를 구하고 등 하원 위치를 좀 더 앞쪽으로 바꿨다. 한 달쯤 그랬을까, 결국 놀이터 앞에서 다시 마주친 공갈빵 사장님이 내게 화를 냈다. 다짜고짜.



"아 제수씨를 닮은 거라니까! 젊은 사람이 말이야! 내가 공부를 얼마나 많이 한 사람인데!"


(무슨 말일까?)  


"네, 죄송해요."



만약에 그분이 정확하게 내게 기분 나쁜 부분을 밝혔다면, 나도 지지 않고 따졌을 거다. (얼굴은 빨개지고 목소리는 떨렸을지언정) 하지만 그분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러니까  제수씨를 닮았다, 젊은 사람이, 내가 공부를 얼마나 많이 한 사람인데 하는 말에 개연성이 하나도 없고 해독이 불가여서 오히려 참게 됐다.


아마도 내 어깨에 손을 올린 후, 내가 바로 장소를 옮기고 자신을 피해 다닌 것이 자존심 상하고 불쾌하셨던 모양이다. 자기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것은 참을 수 없고 자기의 터치로 기분 나빴을 아이 엄마에 대한 미안함은 없는, 게다가 그 이기적인 감정을 한 달 가까이 똘똘 뭉쳐 갖고 있다가 마주치자마자 내게 질러 버리던 모습.  



하지만 작은 일에도 속이 상하면 몇 달이고 끙끙 앓으시던 우리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할머니 할아버지께는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떠나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논리적으로, 법적으로 이게 맞네 저게 맞네 따지던 자식들은 정작 무엇이 그분들 마음에 맺혀 곪고 있는지를 잘 몰랐다. 힘없고 어린 손녀라서 옆에 앉아서 자꾸 말을 걸고 애교 부리는 것 밖에 해드릴 게 없었던 날들이 있었다. 나이가 드실수록 가슴에 맺히는 것이 없게 해드리는 게 낫지 않나 생각한다.



그렇게 죄송하다고 말씀드린 후로도 그곳을 피해 돌아서 다녔다. 동네라 한계가 있었다. 결국 다시 마주치면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 일은 모른다고, 우리 가족은 몇 년 후 공갈빵 사장님과 새롭게 마주하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좁은 집 육아, 넓은 숲 육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