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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이책장 Jul 24. 2022

애쓰지 않아도 마음을 나눠줄 수밖에 없던 시절

최은영 <애쓰지 않아도>



이번 주는 뭔가 이상했고, 행복했고, 늘 그렇듯 불안했습니다. 여기까지 쓰니 감정에 대한 이유를 붙여야 할 것 같은데, 명확하게 말하기 어려워요. 혹은 내 감정을 누군가에게 확인받아야 할 것 같다고 말해야 좋을까요. 누구나 한 번쯤은 겪을 감정이라 생각하며 가볍게 넘기려 해도 그러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 읽은 책 <애쓰지 않아도>가 특히 반가웠어요. 딱 알맞은 시기에 만난, 평범한 인물들의 평범한 이야기와 평범한 감정을 그려낸 책이라서요.




그때 우리는 사랑과 증오를, 선망과 열등감을,

순간과 영원을 얼마든지 뒤바꿔 느끼곤 했으니까.

심장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상처 주고 싶다는 마음이 모순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___31쪽, 최은영, 애쓰지 않아도



<애쓰지 않아도>는 <쇼코의 미소>와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최은영 작가님의 짧은 소설집입니다. 밀리의 서재에서 보내줬길래 밀리 오리지널, 그러니까 신작인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더라고요. 밀리 오리지널 에디션이라는데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밀리에서 보내준 덕분에 좋은 책을, 좋은 시기에 읽을 수 있었어요.


제목 '애쓰지 않아도'는 뒤표지에서 이렇게 설명됩니다. '애쓰지 않아도 마음을 나눠줄 수밖에 없던 시절'  짧은 문장이지만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애쓰지 않아도 속절없이 주게 되는 마음이 있어요. 더 깊게 마음을 주면 내가 아플 것을 알면서도 가는 마음을 접을 수 없죠. 그렇기에 애쓰지 않아도 마음을 나눠주고, 상처 주고, 상처 받게 됩니다. 두렵잖아요. 마음을 주기도, 용기 내기도, 이별을 예상하기도, 이별에 대처하기도.



너는 진짜였고 나는 그게 무서웠지. 

네가 나를 좋아한다면, 네가 내 안에서 무언가 좋은 걸 본다면,

그건 오해일 뿐이고 넌 네가 속았다는 걸 곧 알아차리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떠날 거라고. 난 그걸 견딜 수 없을 테고.

___66쪽, 최은영, 꿈결


짧은 소설집이라 이야기는 진전되지 않습니다. 주로 과거를 회상하거나, 짧은 현재와 미래를 그리죠. 여기에 평범한 인물과 평범한 감정이 더해지자 자연스럽게 내 미래를 상상하게 됩니다. 화자는 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는 그 인물에게 공감하며, 그 인물의 미래를 상상하고,  미래는 어떨까 고민합니다. 그 과정이 괴팍하지 않아 좋았어요. 


읽으며 머리를 쥐어짜게 되는 어려운 책은 아니에요. 다만 직시하기에 어려운 감정들이 담겨 있습니다. 누군가는 마음을 쥐어짜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겠네요. 쓸까 말까 고민했던 문장이 있는데. 그냥 뭐, 누가 읽으려나 싶어서 더합니다. 이 글을 쓰며 출판사 서평을 비롯한 여러 서평을 읽었어요. 두 여성 간의 우정 혹은 애정에 관한 이야기라는 후기가 종종 보이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사랑이라 단언합니다.



미리는 현주를 만나고 나서야 사랑은 엄연히 드러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랑은 애써 증거를 찾아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심연 깊은 곳으로 내려가 네발로 기면서 어둠 속에서 두려워하는 일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어렵게 받을 수 있는 보상도 아니었다.

사랑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그 모든 사실을 알려준 건 현주였다.

___220쪽, 최은영, 무급휴가


이 마음이 사랑이 아닐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내 마음속에서 정해놓았던 기한인 3년이 흐르고 난 후에도 나는 첫 직장을 떠나지 못했다. 이직을 할 자신이 없었으면서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 회사의 좋은 점들을 하나하나 꼽아보고 그곳에 남아 있는 편을 택했다. 나는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불안정한 가능성보다는 불행 속에서 익숙해지고 체념하는 편을 선호했다. 다들 이렇게 살잖아? 나 자신에게 그렇게 설득할 때 내 나이는 스물아홉이었고 너무 늦어버렸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___50쪽, 최은영, 데비 챙




한 뼘 가까이 다가온 이호연이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고 유진을 향해 웃었다. 유진도 그와 함께 웃었다. 그곳에 그렇게 오래도록 앉아 있고 싶었다.

___105쪽, 최은영, 한남동 옥상 수영장




미리는 현주를 만나고 나서야 사랑은 엄연히 드러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랑은 애써 증거를 찾아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심연 깊은 곳으로 내려가 네발로 기면서 어둠 속에서 두려워하는 일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어렵게 받을 수 있는 보상도 아니었다. 사랑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그 모든 사실을 알려준 건 현주였다.

___220쪽, 최은영, 무급휴가




미리의 그림 속에서 현주는 한 손으로 감나무를 만지면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웃어봐, 현주야. 사진 찍을 때 그렇게 부탁하면 쑥스럽게, 그렇지만 한순간 환하게 웃는 현주 특유의 웃음이 있었다. 그 표정을, 미리는 현주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었다.

___231쪽, 최은영, 무급휴가




정민은 윤이의 사랑을 받는 법을 알 수 없었다. 윤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확신한 순간 두려워졌다. 도망가야 했다.

___62쪽, 최은영, 꿈결



그래서 나는 너를 잃는 것이 아파. 나의 무능력과 약함 때문에 이곳에 홀로 설 수 없는 내가 밉고 부끄러워.

(···)

지호야, 나는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어느 시점까지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었어. 큰 선택을 해야 할 때마다 덜 상처받고, 덜 위험한 길만을 골라서 갔지. 그리고 그건 언제나 내 마음속 욕구와는 다른 길이었던 것 같아. 계속 그런 식으로만 살다 보니 나중에는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게 되더라.

___82~83쪽, 최은영, 숲의 끝



마음이란 건 하도 걸어 물집투성이가 된 발바닥 같았다. 예쁜 눈물이 흘러내리는 얼굴이 아니라.

___104쪽, 최은영, 한남동 옥상 수영장



산다는 건 좋은 건데 말이야. 내가 나로 산다는 건 좋은 일인데 말이야. 그래서 살아보고 싶었지. 내가 나라는 게 왜 죽을 이유가 되어야 했지.

우린 여기에 있잖아. 내가 말한다.

___123쪽, 최은영, 우리가 그네를 타며 나눴던 말



사람의 마음은 좀처럼 지치지를 않나봐요. 자꾸만 노력하려 하고, 다가가려 해요. 나에게도 그 마음이 살아 있어요.

___163쪽, 최은영, 손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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