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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Nov 14. 2021

누군가는 내 속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날

벌새

영화 <벌새>를 처음 본 건 재작년 겨울이었다. 어둠 속에 화면이 켜지고, 단발머리 소녀가 나타나 제 집이 아닌 엉뚱한 집의 문을 두드리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되었다. 자기 집 문이라는 걸 눈치 채지 못한 채 열어 달라고 소리치는 소녀의 갈라진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가느다란 두려움. 아직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 첫 장면에서 이미 나는 <벌새>가 이야기를 보여주는 그 모든 방식에 매혹되었다.


영화는 주인공인 소녀 은희의 시선을 아주 세밀하게 따라간다. 은희가 느끼는 햇빛과 공기의 질감까지 그대로 전달될 정도이다. 은희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은 여느 90년대 삶의 풍경처럼 평범하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일들로 가득하다.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가족과 남자친구, 그리고 속내를 터놓는 사이인 단짝친구마저도 때로는 낯선 얼굴을 보이고 가장 깊숙한 곳에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어쩌면 가장 이해하기 힘든 건 바로 은희 자신이어서 그녀의 커다란 두 눈동자는 자주 불안하게 흔들린다. 자기 안에 요동치는 감정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법을 그 누구도 은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영화 <벌새> 스틸컷: 은희와 영지 선생님의 만남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 여러분 아는 사람들 중, 속마음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한문 학원에 새로 온 영지 선생님은 그런 은희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 세상에 얼굴을 아는 사람은 수없이 많지만 속마음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되느냐고. 아무도 몰라주는 것 같은 은희의 속마음. 그럼에도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슬프지만은 않았던 것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이 세상에서도 은희는 벌새처럼 쉼 없이 날갯짓을 하며 자기 자신으로 살아나갈 것임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지 선생님이 남기고 간 편지 속 구절에 담긴 희망처럼.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학원을 그만둬서 미안해. 방학 끝나면 연락할게. 그때 만나면, 모두 다 이야기해 줄게.


영화의 여운은 깊고 오래 갔다. 그냥 멍하게 있을 때도,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거나 친구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을 때도 불현 듯 은희가 생각났다. 폴짝폴짝 트램블린을 타는 은희, 노란색 백팩을 매고 혼자 걸어가는 은희, 텅 빈 집에서 엇박자로 팔다리를 흔들며 춤추는 은희가 종종 나를 찾아왔다.


그 때마다 감독의 인터뷰도 찾아보고, 대본집도 찾아서 읽었다. 대본을 읽으며 영화 속 장면들을 다시 상상하는 일은 즐거웠다. 어떤 장면에서는 영화를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몰입하여 왈칵 눈물이 나기도 했다. 영화 대본 뒤에는 이 영화에 대한 여러 평론가 및 작가들의 평이 실려 있었고, 감독이 앨리슨 벡델이라는 외국 작가와 나눈 인터뷰 내용도 실려 있었다. 그 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최은영 작가의 평도 있었지만 어떤 평도 영화를 완벽하게 담아내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감독 자신이 작품에 대해 덧붙인 말조차 사족으로 느껴졌다. 그만큼 영화가 그 자체로 완벽하게 아름다웠기 때문일 것이다. 페미니즘적인 작품 혹은 개인적 성장기로만 읽어내기에는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다양한 겹들을 너무 많이 놓치게 되어 아쉬웠다. 다만 이 완벽하게 아름다운 작품이 주는 감동을 혼자서는 도저히 다 삼켜낼 수가 없어서 나는 사족처럼 느껴지는 평들조차 꼼꼼히 다 읽었다. 이 영화의 속마음을, 은희의 속마음을 온전히 알 수 있기를 바라며.


누군가의 속마음을 간절히 알고자 할 때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속마음에도 한 발짝 더 다가서게 된다. <벌새>를 보고 읽으며 나는 내 속마음에 한 발짝 더 다가갔는지도 모르겠다. 내 안에도 있는 어린 은희에게 말해주고 싶었는지도. 그래. 때로 세상은 94년 성수대교가 그랬던 것처럼 예고도 없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지만, 그럼에도 참 신기하고 아름답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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