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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비 Apr 01. 2018

사생활과 사회생활 사이

회사적 인간 되기 #4

그럼, 네 언니 남자 친구는 어디 회사에 다니셔?


처음 인턴으로 입사한 회사는 가족적인 분위기가 장점이라고 했습니다. 

대학교 3학년, 사회생활을 처음 경험하는 저에게 커피 좀 타 오라는 심부름이나 복사 좀 해 놓으라는 잡무보다는 '진짜' 업무를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는 친절한 선배님들이 많았습니다.


영화 <인턴> 중


입사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무렵 신입 인턴인 저를 환영하는 팀 회식 자리가 생겼습니다.

회사에서 조금 떨어졌지만 맛있는 저녁을 사주겠다며 맛집으로 데려가 주는 팀 선배님들의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TV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담배 연기 자욱한 술집에서 장기자랑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인간적인 분위기도 좋았습니다.  


답답했던 회사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함께 회식장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는 사소한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저에게는 집은 어디인지, 무슨 고등학교를 나왔는지, 연애는 하고 있는지, 형제관계는 몇 명인지 등등... 몇 가지 일상적인 질문들을 묻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다 곧 제가 회사 선배님들과 나이가 비슷한 언니가 있다는 얘기에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언니는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대학교에서 무슨 전공을 했는지, 아직 결혼 전이면 남자 친구는 있는지...  언니가 남자 친구가 있다는 저의 대답에 옆 자리에 앉은 대리님은 언니의 남자 친구는 어느 회사에 다니는지 물었습니다. 낯선 선배님들께 제가 아닌 언니에 대한 질문들에 대답하는 게 부담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말을 해도 괜찮을까?'

어두운 택시 안에서 잠시 일그러진 표정을 감춘 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며 웃고 말았습니다.



사람들과 툭 터놓고 이야기하게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성격 때문일까요. 그 이후부터는 회사 선배님들과 가까워지는 게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나에 대해서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하고 어느 선까지 솔직한 생각을 말씀드려야 할지 잘 판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죄송하지만 그건 대답하기가 조금 곤란할 것 같아요.'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저 기분이 찜찜해도 묻는 말에는 모두 성실하게 대답을 드려야 하는 인턴사원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했습니다.



회사 복(?)이 있는건지 그 후에 입사한 새로운 회사는 서로가 더 가족 같은 곳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픈하고 싶지 않은 부분은 적당히 웃어넘기며 둘러대면 되는 일이었지만, 능청스럽거나 얼굴이 두껍지도 않은 탓에 사생활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은 부담스럽기만 했습니다.


특히 주말을 떨어져 지낸 뒤 맞이하는 월요일 점심시간은 더 고민이 많았습니다. 나이 차가 꽤 나는 어린 막내였던 저는 자연스럽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주말에 뭐해?"

과장님들의 사소한 질문에도 마치 주말 분석 평가단에게 매 주말의 행적을 평가받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가올 월요일을 위해) 적당히 쉬기도 했고 또 (사회성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들과 적당히 재미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 드려야 할 것 만 같아서 머릿속은 이야기를 짜깁기하느라 바빴습니다.



나는 나중에 꼭 후배들의 사생활을 존중해주는 선배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후배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 까지는 사생활에 대해서 묻지 않고 업무적으로는 친절 이상적인 선배의 모습을 그려 보곤 하면서요.  회사에 조금 더 늦게 들어왔다고 해서 사생활이 보호받지 못하는, 그 유쾌하지 않은 경험 하게 만들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선배가 되는 날이 오기는 할까.'

너무 먼 일 같이 느껴졌는데 어느덧 연차가 쌓이고 팀에 새로 들어온 인턴의 사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점심시간, 그 친구에게 질문 폭격을 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 했습니다.



예전에 제가 받았던 질문들처럼 집은 어디인지, 연애는 하고 있는지, 주말엔 주로 어떻게 시간을 보내지...

너무나 편하게 질문하는 제 자신과 반대로 얼어있는 표정으로 하나씩 대답하는 인턴 친구를 보니 과거의 내 모습이 불쑥 떠올랐습니다.

'지금 이 친구도 그 때의 나처럼 긴장이 될까?'


하지만 곧 이렇게 질문 받는 것이 차라리 이 친구에게는 속 편한 일이라고 합리화하기 시작합니다.

말 한 마디 없는 정적보다는, 아니면 자기 이야기만 하는 상사보다는, 그나마 질문을 받는 편이 수월할 거라고요.   



인턴 시절의 나에게 질문을 던지던 대리님, 과장님, 팀장님들을 떠올려 보기 시작했습니다. 매일같이 어제 본 TV 프로그램에 대해 혹은 반복되는 업무 이야기만 하다가 새로 들어온 인턴 친구와의 대화는 훨씬 더 재미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소한 질문들은 내가 느꼈던 압박감과는 다르게 큰 의미도 의도도 없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업무와 상관없는 질문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던 모습은 잊은 채,

'인턴 친구도 지금은 이 관심이 조 부담스럽겠지만 나중에는 나를 이해해 주겠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며 사적인 대화를 계속 이어갑니다.

_

내가 그렸던 이상적인 선배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그저 그런 선배가 되는 것 같아 스스로에게 쉬운 마음이 생깁니다.

른 한 편으로는 난 그렇게 나쁜 선배는 아닐 거라, 칼퇴하는데 도움도 안 되는 일에 마음 두지 말 넘겨 버리는 회사적 인간으로 또 한 번 자라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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