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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 Jung Dec 13. 2019

얼렁뚱땅 산티아고 순례길 09

귀가 얇으면 발이 고생한다.

열다섯번째날.




방을 혼자서 쓴다고 원초적인 복장으로 잠이 들었더니 몸 상태가 약간 안 좋다. 아니 어제저녁에 마신 와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마음은 가볍다. 이제 70km만 더 가면 또 한 번의 대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기 전의 마지막 대도시인 'Leon 레온'이다.


그곳에 가면 좋아하는 '켄터키식 닭튀김'을 포함한 온갖 패스트푸드도 있고, 큰 마트도 있어서 라면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전에 두 번의 대도시에서 실패했던 숙소 예약까지 완료해서 아침 출발의 발걸음은 날아갈(?) 것 같다. 물론 2시간 지나면 구시렁대고 있을게 뻔하지만.


레온의 숙소는 삼일 뒤로 예약을 했다. 조금 무리하면 이틀에 갈 수도 있겠지만 꽤 빨리 걸어왔고 며칠 동안 쉴 틈이 없었기에 오늘까지만 30km 넘게 무리하고 이틀은 쉬엄쉬엄 가기로 했다. 70km를 삼등분해서 가면 더 좋지만 중간에 12km, 3시간짜리 코스가 애매하게 들어 있어서 오늘 12km 시작하는 마을까지 조금 무리하기로 계획했다.


며칠 전부터 계속 평지여서 지루한 감이 있지만 걷기에 훨씬 편하다. 앞뒤로 아무도 없고, 주위에 아무것도 없어도 평지가 좋다. 산길은 싫다. 단순히 언덕 때문만은 아니고 길 자체가 안 좋다. 산길은 돌도 많고 내리는 비에 길도 많이 파여서 발목에 무리가 가고 삐끗하기도 쉽다. 다행히 순례길의 중간쯤인 이 구간들은 계속 평지여서 한창 포기하려는 마음이 들 때 살짝 사람들을 달랜다.


'거봐 할만하잖아' 하면서...



벌판을 계속 걷다가 마을 몇 개를 지나치고 아침 먹을 타이밍을 놓쳐서 길 중간에 있는 벌판의 휴식 공간을 찾아갔다. 그곳에 먼저 와 있던 유럽의 젊은 친구들 사이로 '잭'이 보인다. 초반에 같이 잠깐 걸었던 5인방 중에 가장 친화력 좋았던 잭을 다시 보니 무척 반가워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일주일만 걷고 돌아간 토마스를 빼고 7일차에 숙소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8일차에 4명이 같이 출발했는데 나랑 크리스티앙은 그날 38km를 걷고 잭과 달리아는 천천히 온다고 했었다. 다음날 크리스티앙과도 헤어지고 그 이후로 혼자 걸었는데 15일 차에 이렇게 다시 만나니 정말 반갑고 신기했다.


일주일 동안 비슷한 길을 걸었는데 한 번도 못 본 것도 그렇고, 나는 정말 빨리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앞에 잭이 있으니 그것도 신기했다. 잭의 옆에는 그의 단짝(?) 달리아도 함께 있었다. 달리아 발의 물집은 정말 심각했는데 여기까지 벌써 와 있다는 것도 더욱 신기했다. 그리고 그들의 곁에는 같이 걷는 새로운 얼굴의 친구들이 보였다.


잠깐 동안의 휴식을 끝내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시 길 위로 나섰다. 젊은 친구들이어서 그런지 역시 다들 잘들 걸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늘의 목적지는 같았다. 그렇기도 한 것이 그 마을 다음에는 12km를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목적지가 숙소가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앞서가는 사람들보다 뒤 마을에서 출발한 듯 일찍 출발했는데도 의외로 앞에 사람들이 많았다. 만약을 대비해서 웬만하면 쉬지 않고 부지런히 걸었다. 그리고 드디어 34km를 걸어 'El Burgo Ranero'에 도착했다.


점심시간을 살짝 넘겨 도착했는데 역시나 원했던 숙소는 꽉 차있었고 할 수 없이 내키지는 않지만 기부로 운영되는 공립 숙소로 갔다. 이곳은 침대 수가 정해져 있어서 도착하는 순서대로 숙박계를 작성하는데 내 뒤로 몇 자리 안 남았다. 잠시 후 나보다 빨리 걷지만 많이 쉬며 오느라 뒤늦게 잭이 도착했고, 그를 마지막으로 숙소가 꽉 찼다.


그 뒤에 도착한 사람들은 침대가 없어 난감해했다. 그중에는 달리아도 있었다. 잭과 달리아는 2일째부터 계속 같이 다녔는데 처음으로 헤어지는 것 같았다. 샤워를 하고 나와 분위기를 보니 나이가 좀 있는 사람들은 식당에 딸린 개인방을 잡았고 젊은 친구들은 12km를 더 걸어가는 것 같았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아침에 걷는 12km도 힘든데 다 끝났다고 생각한 상황에서 12km는 정말 상상이 안됐다. 놀란 가슴을 동네 유일한 가게에 가서 콜라와 아이스크림과 과자로 달랬다.










알베르게에 이런 표시가 있으면 가슴이 덜컹한다. 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열여섯번째날.




깨끗하게 관리하려는 노력은 보이지만 건물이나 시설이 워낙 노후화돼서 침대 프레임이나 매트리스도 깔끔하지 않아서 잠자리가 불편했다. 또 하필 주위에 온통 서양의 어르신(?) 들이어서 더더욱 조심하다 보니 잠이 일찍 깨었다. 그렇다고 잠을 계속 설치거나 선잠을 자는 건 아니다. 워낙 피곤하다 보니 일단 한 번은 까무러치듯 잠이 들고 그다음에 깨어나기 때문에 많이 피곤하지는 않다.


이번 길을 걸으며 잠 관련해서 두 가지를 중점에 두었다. 낮잠을 자지 않기와 9시 넘으면 무조건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해가 너무 길고 어떤 날은 점심때면 도착하기 때문에 시간이 무척 많이 생기지만 낮잠을 자면 밤에 못 자고 다음날 일어나는데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최우선 법칙으로 정했다. 그 덕분에 일찍 잠자리에 들 수 있었고 평소에도 일찍 일어났기 때문에 기상에도 문제가 없었다.


아직까지는 한 번도 그 법칙을 깨지 않았다. 6시가 되어서 짐을 주섬주섬 챙겨 아래층에 내려가 출발 준비를 하는데 잭이 벌써 배낭을 메고 출발한다. 그의 옆에는 달리아가 아닌 새로운 친구인 이탈리아 아가씨가 있었다. 둘이 먼저 출발하고 그 뒤에 바로 따라나섰다.

또다시 끝없는 평지를 그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사실 나는 37km를 이틀에 걸을 계획이었기 때문에 오늘은 마음이 급할 게 없었다. 그래서 쉬엄쉬엄 걸으니 그들과 자주 마주쳤다. 어느 작은 마을의 바에서 콜라를 마시며 잭과 다시 마주쳐서 이야기를 하다가 오늘의 목적지 이야기가 나왔다. 잭은 오늘 대도시인 'Leon 레온'까지 간다고 했다. 내 계획을 이야기하니 잭이 나를 꼬셨다.

'정!! 조금만 더 가면 오늘 레온에 갈 수 있어. 같이 가자!!!'


나는 다음날 숙소를 예매해 놔서 굳이 오늘 갈 필요가 없는데 잭이 자꾸 꼬시니 마음이 동했다. 그래도 일단 예약한 숙소가 아까워 다음날 갈 거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다음 휴식처에서 다시 만난 잭이 또 한 번 꼬셨다.

'정!! 할 수 있어!!!'

나는 바로 숙소 예약 사이트에 들어가서 취소나 날짜 변경을 확인해 보았다. 둘 다 불가능했다. 그래서 오늘 날짜로 하루를 더 예약했다. 내일은 2인실이 예약되어 있는데 오늘은 방이 없었다. 오늘은 6인실과 4인실이 남아 있었다. 4인실을 추가 예약했다. 겸사겸사 내일 하루는 나에게 휴가를 주기로 했다. 그렇게 귀 얇은 죄로 마음의 준비도 없이 다시 37km의 대장정을 잭과, 이탈리아 아가씨와 셋이서 함께했다.



대도시로 진입할 때는 평소보다 더 힘이 든다. 입구가 길기도 하거니와 다 왔다는 조급한 마음 때문에 더욱 멀고 힘들게 느껴진다. 거기에 레온은 도시 입구에 꽤 높은 오르막이 존재한다. 레온까지 온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가 급하게 변경을 해서 출발시간도 늦었고 마음도 굳게(?) 먹지 않아서인지 오르막이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셋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하듯 함께하듯 걸어서 드디어 그 언덕의 정상에 도착했다. 저 아래 레온의 모습이 보였다. 오르막이 힘들면 내리막은 더 힘들다. 공사를 하는지 길이 더 안 좋은 레온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에서 잭과 이탈리아 그녀는 갑자기 무슨 힘이 그리 생겨났는지 뛰듯이 내려간다. 내리막길에서 어떤 때는 뛰는 게 덜 힘들기 때문에 나도 뛰듯이 따라갔지만 둘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이왕 늦은 거 마음을 느긋하게 먹기로 했다. 가장 큰 고민인 숙소도 이미 예약을 했겠다 가는 길에 이곳에서 실행하려 했던 숙원사업을 진행하고 가기로 했다. 평소라면 절대 할 수 없는 배낭 메고 마트에 가고 켄터키 통닭 먹으러 가기로 결정했다. 핸드폰 지도로 검색을 해보니 하늘이 도왔는지 대형 마트와 닭집이 같은 쇼핑몰에 있었다.


15kg짜리 배낭은 보관함도 없어서 카트에 넣고 장을 봤다. 물건을 사기도 전에 카트는 배낭으로 꽉 찼다. 무거운 카트를 밀고 그 큰 카르푸를 몇 번을 돌았는데 라면을 못 찾았다. 일단 중국식 라면과 즉석요리들로 장을 보고 그 옆의 KFC로 갔다. 다들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이에서 자리를 잡고 주문을 했다. 뱃속의 기대치가 최대로 올라와 있는 상태에서 치킨 세트를 주문하고 콜라는 '큰 거'로 사이즈를 올렸다.


계산을 완료하고 그녀가 커다란 빈 콜라 컵을 내미는데 이전의 대도시 '로그로뇨'에서의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이곳도 음료를 자기가 따라 마시는 셀프서비스였던 것이다. 몇 번을 리필해도 되는.. 컵의 사이즈가 중요하지 않은.. 라~아지 컵에 콜라를 가득 따르며 두 번의 실패를 거울삼아 다음에는 주문하기 전에 주변 상황을 살피는 침착함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배낭과 배를 채우고 느긋하게 숙소를 찾아 나섰다. 대도시는 역시나 커서 그곳에서도 한참을 걸어야 했다. 시간도 어중간한 시에스타 시간이어서 숙소에 도착하니 주인이 없었다. 전화번호가 적혀있어 전화하니 5시까지 점심 먹고 온다고 한다. 역시 스페인이었다.


주인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달리아가 나타났다. 그녀도 이곳 6인실에 묵는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있다면 당연히 잭도 있다고 생각해서 함께있냐고 물으니 '잭은 어디 묵는지 몰라'라고 대답한다. 왠지 실수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인이 와서 내 방을 배정받고 보니 4인실에는 4명이 꽉 차고 6인실에는 2명만 묵었다. 몇 유로 차이 나지 않지만 비싼 방이 꼭 편하지만은 않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레온에 가까워질수록 귀여운 순례길 표시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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