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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혁진 Mar 10. 2020

26년 차 사람, 1년 차 개발자 - (2)

1년 차 개발자


  26년 만에 처음으로 홀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의 목표는 그저 막연하게 '한 해를 되돌아보자'였지만, 그간 기록해놓은 글들이 꽤 쌓여 있었고, 읽었던 아티클들과 새롭게 깨달은 지식들이 산재해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이것들을 정리해서 기록해보자'라고 생각을 바꿨다. 훗날 이 글을 다시 읽게 될 나 자신과, 스쳐 지나가듯 글을 마주하게 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나의 2019년을 빗대어 표현해보자면, ''번데기에서 우화 하여 갓 성충이 된 나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갓 날기 시작했을 뿐이지만 그만큼 뜻깊은 한 해였고, 나의 삶에 큰 변화와 성장이 있었다. 꿈만 꾸던 학생에서 어느덧 사회인이 되었고, 몇 번이고 자질을 의심하며 낙담했던 학생에서 1년 차 개발자가 되었다. 이렇게 여러 주제로 말할 수 있는 내 1년을 사회인, 개발자, 멘토, 사람이라는 4가지의 주제로 나눠 서술해보려고 한다.



2편. 개발자


  나의 1년 중에서 가장 가슴 벅차고 의미 있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꿈을 꾸고 많은 장애물 속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며 지쳐갈 쯤에 나는 개발자가 됐다.



흥미

  나는 처음부터 개발이 재밌다거나 개발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다만 내가 생각한 서비스를 내 손으로 구현하는 것이 신기하면서 재밌었고, 개발은 그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실리콘 밸리에 관심이 있었고 IT 관련 비즈니스 공부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개발자라는 직업에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일하는 방식이나 문화들이 한국의 낡은 기업 문화를 보고 자라온 나에게 큰 충격을 줬고, 저렇게 일을 하면서 살면 주체적이고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개발이 재밌어서 진로로 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경험이 쌓이고 현실을 마주할수록 나를 많은 고민 속에 빠져들게 했다. 세상이 말하는 개발자라는 직업의 특성과 자질에 나 자신이 부합하지 않는 것 같았고, 현실의 개발자는 코드라는 수단으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펼치는 직업이라기 보단, 고도의 지식과 덕후의 기질을 지닌 전문가 집단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자신감이 떨어져 갔다.


 그런 어정쩡한 상태에서 운 좋게 우아한테크캠프라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고, 좋은 스승을 만나 개발에 대한 새로운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테크캠프를 하기 전에는 ''나라는 사람은 새로운 서비스를 만드는 스타트업에서만 일에 대한 재미를 느낄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는데, 함께 일 할 누군가를 생각하며 코드를 짜는 것과 유지보수와 서비스의 확장성을 고려하며 코드를 짠다는 것이 나에게 다른 차원의 재미를 보여줬고, 나는 그제야 개발이 이해되어 그 자체에 흥미가 생기게 되었다. 2019년이 끝나가는 지금도 여전히 기술과 개발이 좋다. 앞으로 얼마나 흥미가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개발자는 직장을 벗어나도 가치가 있는 활동을 할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에 그때 가서도 또 다른 차원의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조심스레 긍정적인 예측 해본다.



시야 확장

  대학생 때, 우물 안으로 한정되어있던 시야가 테크캠프 경험을 통해 우물 밖으로 넓혀졌다. 인터넷 시대에 우물 안이 어딨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주변에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앞서 나가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환경에서 인터넷을 바라본다한들, 그 정보의 바다는 말 그대로 망망대해일 뿐이다. 그런 망망대해 속에서 테크캠프 경험은 나침반 역할을 해줬다. 하지만 그 나침반은 단기적인 기술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학습한 것들에 대해 원론적으로 파고들수록 나의 시야가 여전히 좁다는 느낌이 들었고, 같은 고민에 대해 더 넓은 관점에서의 의견을 말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과, 현업에서는 주로 어떠한 고민들을 할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배민과 네이버에서 만난 개발자분들의 SNS를 모두 팔로우 하기 시작했고, 그분들의 기술적인 관심사, 특정 주제에 대한 의견, 어디서 정보를 얻으시고 어떻게 학습하시는지, 현업 이야기 등을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던 말들이 시간이 지나고 어느 시점에 다른 지식과 얽혀 이해되는 게 재밌었고, 그러다 보니 더욱 다양한 생각들과 관심사들을 접하고 싶다는 마음에 그분들이 활동하고 있는 커뮤니티, 그룹, 그리고 그분들이 팔로우하고 있는 또 다른 개발자 분들을 팔로우하며 시야를 확장시켜갔다.


  그림을 많이 본다고 내가 그림을 잘 그릴 수 있게 되는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어떤 그림이 잘 그려진 그림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본인 머릿속에 관련된 정보들이 많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시야를 넓혀가지 않으면 금세 우물이 형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개발자가 직접 부딪혀가면서 학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간접적으로 시야를 확장시켜나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활동은 입사하고 나서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고, 바로 옆의 동료들이나 사내에서 깊은 지식과 정보를 공유해주시는 분들을 통해 더 넓은 반경으로 시야를 확장해나가고 있다. 올해는 그림을 많이 보는 것에 시간을 쏟았고 내년부터는 그림을 직접 그려보는 연습에 좀 더 집중하려고 한다.



성장, 지속 가능한 개발자

  성장은 개발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단어 중 하나다. 물론 다른 직군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우리의 삶에서도 성장이라는 단어가 많이 쓰인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단어가 ''유행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기저기서 만능 용어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걸 가장 크게 느꼈을 때가 후배들을 멘토링 해줄 때였는데, 본인이 하고 있는 게 즐겁지 않고, 왜 하는지 정확히 모르는데 이걸 하면 다른 사람처럼 성장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물론 자신이 성장했다는 것을 느낄 때는 그게 무엇이 됐건 뿌듯하다. 하지만 성장에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맹목적으로 성장했다고 하면 장땡이 아니라, 내가 이걸 함으로써 성장을 하지만, 그 성장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인지 고민을 해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장의 방향에는 삶의 목적이 담겨있어야 한다.


  내가 살아오면서 접한 많은 강연들이나 자료들에서도 항상 성장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 또한 최면에 걸린 듯이 '개발자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성장해야 해'라는 생각에 빠져있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집에 가서 쉴 때도, 데이트할 때도, 기술 관련 문서를 읽고 있었고, 하고 있던 프로젝트의 코드를 생각하고 있었다. 입사 초반까지는 나는 이게 당연히 개발자로서 추구해야 될 기본자세라고 생각했다. 물론 재미없는데 억지로 한건 아니지만, 가끔씩 개발이라는 세계에서 벗어나 있는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개발자와 거리가 먼 생활환경을 접할 때마다 삶이 허무해지고 '난 뭐 하고 있었던 거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학창 시절에 게임 중독에 걸려서 그 세계에만 빠져 살다가, 막상 벗어나니까 그제야 보이는 세상 속에서 느껴졌던 허무함과 비슷했다.


  어찌 보면 나는 성장에 대한 일종의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그토록 좋아하던 영화를 봐도, 드라마를 봐도, 게임을 해도,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 시간에 뭐라도 더 읽거나 공부를 더 해야 된다는 강박이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입사 초반까지 쭉 이어졌고, 그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좋아했던 취미들과 하고 싶었던 일들을 잊게 됐다. 개발자로서 성장은 하고 있었지만, 나를 구성해왔던 것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느 순간 번아웃이 오기 쉬워진다. 나도 막 번아웃이 오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때 마침 존경하는 팀장님이 올해의 나에게 가장 소중했던 말씀을 던져주셨다.


 "쉴 때 제대로 못 쉬는 것만큼 바보 같은 건 없다. 쉬면서 '아! 공부해야 되는데, 뭐 해야 되는데', 이런 생각이 들면 제대로 쉬는 게 아니다."


  처음엔 팀장님 같은 참개발자 입에서 나올만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팀장님 같은 개발자라면 저런 경우에 어떤 식으로 극복해서 공부를 했는지 경험담을 이야기해주실 거라고 예상했으나, 쉴 때 공부를 왜 하냐는 듯한 이야기를 하셔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일관되게 주장하시는 것이 한 가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지속 가능한 개발자'다.


  팀장님께서 회의 때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생각난다. 우리는 '지속 가능한 개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더 나은 코드, 더 나은 개발환경을 위해 고민해야 하고, 자동화할 수 있는 건 자동화해서 좀 더 중요한 본질적인 가치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하고, 모든 팀원들이 모든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하여 상호 간에 리뷰도 활성화시키고, 쉬고 싶을 때 언제든 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신입인 나보다 고작 몇 달 먼저 입사하셨지만, 1년 만에 저런 목표를 갖고 팀의 코드부터 문화까지 많은 것을 바꾸셨고, 나에게도 많은 깨달음을 주셨다.


  지속 가능한 개발자가 되기 위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더 나은 코드, 더 나은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하고, 동시에 번아웃이 오지 않게 완급 조절을 잘해야 한다. 그 완급 조절을 하는 방법 중 하나가 '잘 쉬는 것'이다. 쉬는 시간을 늘리라는 뜻이 아니라, 쉰다고 마음먹었으면 온전히 쉬는 것에만 집중하라는 뜻이다. 개발자스럽게 표현하자면 개발과 휴식 간의 결합도를 낮추고 각각의 응집도를 높여야 한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쉬는 것과 더불어서 중요한 , 다른 사람들이  글을 보고 '다들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나는  하고 있지?'라는 반성을 적당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변 친구들이나 후배들이 이런 식으로 반성만 하다가 우울감에 빠지거나 개발을 그만두는 경우를 종종 보았는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자극받는 글들의 대부분은  사람들의 열정을 뿜어낸 시간에 대한 글이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글을 읽다 보면 그들의 열정이 담긴 글을 모두 합쳐서 자신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 사람처럼 spring  공부해야 하는데,  사람처럼 TDD 연습해야 하는데, docker 공부도 해야 하는데, ' 등등 이렇게 비교만 하다가 기술 부채가 쌓이고 자존감이 무너지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기술 부채가 쌓이는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기 페이스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예전에 테크캠프   이동욱 님께 ''인생을 전력 질주하면서 사시는  같은데 힘들지 않나요? ''라고 여쭤본 적이 있다. 돌아온 답변은 전력질주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고, 동욱 님은 본인이 생각한  안에서 페이스에 맞춰서  달리고 계셨다. 그게 재밌어서 하는 사람과 그렇게 해야   같아서 하는 사람의 차이는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눈에 보인다. 지속적으로 불행하다고 느껴진다면 본인이 즐길  있는 최선의 페이스를 찾도록 노력하자. 나는 올해 나만의 페이스를 어느 정도 찾은  같아서 행복하다.



11번가

  취준생 시절의 나에게 11번가는 입사에 대한 상상을 한 번도 안 해본 여러 기업들 중 하나였다. 11번가가 자체적으로 개발을 하고 있는지, 어느 회사의 서비스인지, 아직도 사용자가 있는지 등 평소에 관심이 아예 없었다. 그런데 채용공고를 우연히 보게 되었고, 서비스 기업 중에서도 규모 있는 커머스나 포털 쪽을 가고 싶었던 나에게는 11번가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알아보니 11번가는 내가 좋아하는 개발자분들이 몸 담았었던 SK플래닛의 사업부 중 하나였고, 내가 취준 하던 당시에 분사가 이뤄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게 중요했던 건 11번가의 개발 문화나 그곳에서 일하시는 개발자분들에 대한 정보였고, 이제 갓 분사가 이루어져서 그런지 정보가 너무 없었다. 그나마 겨우 발견했던 것은 윤용성 님께서 발표하신 11번가 MSA 전환 관련 영상과 백명석 님의 클린 코더스 강의브런치 글들이었다. 이 두 가지 정보가 나에게 임팩트를 크게 주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고민을 하고 있던 와중에 입사에 대한 확신을 줬던 건 바로 윤용성 님과의 최종면접이었다.


  취준 하면서 자존감이 떨어지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던 나는, 반 포기 상태로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주고 오자'라는 생각을 하고 면접장에 들어갔고, 용성님은 그런 나를 진심 어린 관심으로 맞이해주셨다. 면접이 사적인 경험이나 고민들로 흘러가도 그것에 대해 깊이 공감해주시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진짜 좋은 사람이고, 좋은 개발자고, 좋은 선배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입사해서도 그때 받은 느낌이 틀리지 않았구나 라는걸 느끼고 있다. 허례허식 없이 프로페셔널한 모습과 순수하게 기술을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며 회사원으로서, 개발자로서 많이 배우고 있다. 그렇게 나는 최종적으로 11번가를 선택하여 입사하게 되었고,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신입 뽕에 취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매우 만족하며 다니고 있다.



레거시

  의외로 회사 와서 크게 배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레거시 코드 때문이었다. 입사 전에는 레거시 코드를 짠 사람도 무능력한 사람이고, 그런 오래된 레거시를 가지고 개발하는 회사도 가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여기저기서 들은 이야기 때문에 그렇게 세뇌된 듯하다. 하지만 11번가에 오자마자 처음 마주했던 건 오래된 레거시 코드의 유지보수 티켓이었고 나는 코드를 보면서 많이 실망했다. 처음 보는 패키지 구조, 낯선 프레임워크, 낮은 자바 버전, 축약형 네이밍, 긴 메서드 길이, 테스트 코드 부재 등등, 테크캠프에서 이쁜 코드만 배우다가 말로만 듣던 레거시 코드를 접했는데 눈 앞이 깜깜해졌다. 그래도 업무를 진행하려고 레거시 프로젝트의 구조와 코드들을 천천히 살펴보았는데, 스프링 부트로 어노테이션 떡칠하면서 원리도 제대로 모르는 채 개발했던 때와는 달리, 처음 보는 이 프레임워크가 어떻게 동작하는지 원리를 알아야 업무를 할 수 있었고, 원리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특정 기술들의 역사와 기본도 모르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코드를 짜면서 느꼈다. 나도 결국 레거시에 레거시를 쌓아가고 있구나 라는 것을. 이걸 개발했을 당시에는 일정, 상황 등을 고려했을 때 이게 최선이었겠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코드 위에 아키텍처가 있고, 아키텍처 위에 문화와 비즈니스가 있다. 레거시를 다루면서 이것을 알게 되었고 다른 개발자들을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아직까지 내가 생각하기엔 개발의 핵심은 협업이다. 협업을 잘하기 위해서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먼저 이해해야 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의견을 펼쳐야 한다. 그런 점에서 레거시를 다루는 업무가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그리고 레거시 덕에 좋은 코드란 무엇이고, 안 좋은 코드는 왜 안 좋다고 하는지 직접 부딪히면서 배울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여태 공부한 지식이 모두 껍데기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마주할 코드에는 편리한 프레임워크나, 예쁘게만 작성된 코드들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고, 그런 것들에 큰 영향을 받지 않으려면 기반 지식을 잘 쌓아야 한다는 것을 입사하자마자 레거시를 통해 배웠다. 이렇게 주어진 업무가 무엇이 됐건 그걸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얻어가는 게 있고 없고 가 판가름 나는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레거시를 개선할 생각은 안 하고 그 속에서 주구장창 유지보수만 하는 회사는 여전히 기피 대상이다. 하지만 11번가는 거대한 레거시를 몇 년 전부터 개선해오고 있었고, 개발 문화 또한 하루가 다르게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이미 개발 문화가 좋은 회사, 개선해나가고 있는 회사, 개선할 생각이 없는 회사'' 중 신입이 배울게 많은 곳은 개선해나가고 있는 회사다. 이미 다 갖춰진 환경에서는 좋은 개발을 할 수 있고, 좋은 문화를 경험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게 왜 좋은 건지에 대한 질문이 주어진다면, 교과서적인 답변만 할 수밖에 없다. 본인이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깊이가 얕다. 흔히 금수저가 흙수저의 삶을 겪어보지 못하고 삶에 대해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반면에 개선해나가고 있는 회사에서는 안 좋은 환경, 문화를 경험해보면서 그것을 왜 개선해야 하는지, 왜 그렇게 개발을 해야 하는지, 왜 그런 문화를 만들어야 하는지 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면서 나아갈 수 있다. 흙수저가 자수성가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둘 다 비슷하겠지만, 내적으로 쌓인 내공의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평생 다 갖춰진 회사만 다니면 괜찮겠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회사가 훨씬 많고 그런 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고 커리어를 이어가려면 지식의 뿌리가 단단해야 한다. (이렇게 셀프 합리화하면서 만족스러운 회사 생활 중이다)



구현 관점, 유지보수 관점

  입사를 기준으로 전, 후를 나누었을 때, 나를 기술적으로 가장 크게 도약시켜준 포인트는 관점의 변화였다. 예전에는 구현 관점에서만 생각하던 것을, 회사에 들어와서는 구현을 넘어 유지보수, 확장성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기본에 좀 더 충실한 공부하게 되었다. 학교 다닐 때는 실제 사용자를 고려하면서 개발한 게 아니라 그냥 완성만을 목표로 한 구현 관점에서 개발을 했었다. 그래서 빠르게 구현하는 게 곧 실력이라고 생각했고, OOP, 테스트 코드, 디자인 패턴 등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취준 할 때나 시험 볼 때 빼고는 깊게 공부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회사에 와서 방대한 코드를 접하고, 그걸 여러 사람들과 함께 유지 보수하고 확장해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왜 저런 기본 지식들이 중요한지 필요성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구현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공부하면, 같은걸 쉽고 빠르게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고, 새로운 프레임워크, 언어, 라이브러리 등에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서비스는 둘째 치고, 나이가 먹을수록 젊은 사람들에게 본인의 경쟁력을 뺏기게 된다. 하지만 유지보수와 확장성 관점에서 바라보고 공부하면, 좀 더 안정적이고 비즈니스의 성장에 맞춰 확장할 수 있는 코드를 고민하게 되고, 거기에서 많은 장인들이 정립한 개념들을 공부하거나, 로우 레벨로 필요성을 느끼며 공부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나이가 먹을수록 경험이 쌓여 뿌리가 깊게 자리 잡게 되고, 기업은 빠르게 구현한 스파게티 결과물에서 성장의 한계가 발견될 때 뿌리가 깊은 사람들을 원하게 된다. 나중에도 이걸로 먹고 살 수나 있으련지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시장의 니즈가 이런 것 같다. 나는 올해 이런 관점의 변화를 통해 '왜'라는 질문을 여기저기 던지면서 본질적인 것들을 이해하는 것에 시간을 많이 쏟았다.



동료

  2019년을 알차고 행복한 한 해로 만들어주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다. 입사 직전, 사회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은 나에게 어떠한 긴장감을 줬었고, 나는 그 긴장감 속에서 사람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첫 팀원들, 첫 팀장님, 첫 동기들은 이런 긴장감을 다 없애버릴 만큼 좋은 사람들이었다.


  조미료 조금만 더해서 우리 팀을 표현해보자면, '여기는 실리콘밸리'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어렸을 때부터 실리콘밸리를 동경해 온 사람이 부여할 수 있는 최고의 수식어다. 허례허식이 전혀 없고, 신입이 마음껏 날뛸 수 있는 환경을 존경하는 팀장님과 다양하고 선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조성해준다. 내가 일하다가 막히는 게 있으면 옆자리의 시니어 동료 분이 페어 프로그래밍을 먼저 제안하시기도 하고, 질문하는 것과 받는 것에 다들 거부감이 없는 게 좋다. 회사 자체가 수평적이고 직급이 없고 자유로운 문화인 게 한몫하는 것 같다. '크루'라는 단어가 정말 잘 어울리는 팀 덕분에 매일 회사 오는 게 즐거울 정도로 2019년이 좋았다.


  팀뿐만 아니라 그룹장님, 담당님 또한 정말 좋은 동료라고 말하고 싶다. 백명석 그룹장님은 매주 화요일마다 '클린 코드', '레거시 코드 활용 전략', '클린 아키텍처' 등의 책들을 가지고 세미나를 해주신다. 처음에는 내용이 어려웠지만, 점차 공부를 하다 보니 이 세미나는 명석님의 내공이 담긴,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세미나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명석님은 회사에 올라오는 수많은 PR들에 코드 리뷰도 틈틈이 달아주신다. 고위 직책자가 코드 리뷰까지 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해봤는데 상당히 많은 코드에 리뷰를 달아주시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덕분에 11번가는 코드 리뷰 문화가 잘 정착되어가고 있다. 사내에서 슬랙을 사용하는데, 모든 PR과 리뷰들이 web hook을 통해 채널에 게재된다. 그 속에서 다른 팀끼리도 서로 리뷰를 주고받고, 깊은 기술 지식들을 공유하는 문화가 조성되고 있다. 윤용성 담당님 또한 많은 코드들에 리뷰를 남겨주시는데, 주로 유지보수와 확장성 같은 아키텍트 관점에서 리뷰를 남겨주시는 명석님과는 달리, 로직의 구멍이나 성능, 특정 기술의 잘못된 사용, 언어와 기술에 대한 깊은 내용들, 사내 플랫폼들의 히스토리 등, 엔지니어 관점에서 리뷰를 잘 달아주신다. 그리고 좋은 책이 출간되면 용성님은 개인 비용으로 책을 사서 원하는 사원들에게 나누어주신다. 입사하고 이펙티브 자바 3판과 모던 자바 인 액션과 오브젝트를 받았다. 그리고 늘 허례허식 없이 신입들을 대해 주시고, 업무 할 때는 완전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주셔서 함께 일하는 게 영광스러울 정도다. 두 분은 특징과 관심사가 분명 다르지만, 그걸 보고 배우는 내 입장에서는 환상의 조합이라고 느껴졌다. 그래서 내 2019년이 2배로 알찼다.




개발자로서 보낸 1년 차는, 내 주위의 사람들 덕분에 기대했던 것 훨씬 이상으로 만족스러웠고 행복했다.


기술적으로 공부했거나 배운 것들도 많지만, 이번 글에서는 그런 것들을 배제시키고 오직 나만이 쓸 수 있는 내용이 담긴 글을 쓰고 싶었다. 다음 편도 그러할 것이다.



3편 - 멘토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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