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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하 Feb 27. 2019

여행의 리얼리티

고무줄과 전선이 날파리처럼 꼬일 때

목과 두 눈동자가 뒤통수에 가 붙을 때

사랑한다는 고백이 진심일 때

외로움을 오래 보관하고 싶을 때


낡은 외투를 세탁소에 맡기고 그대로 줄행랑친다


납작해진 코를 부풀리기 위해

혹은 더 깨끗이 밟아 파묻기 위해


입술에 손가락을 대는 것

폐업한 나라의 흥망과 성쇠의 전말을 듣는 것

낭만과 실망은 같은가 다른가

나, 라는 이상함을 메고 끌고 들고

길을 걷다가 멈춰 서서 울어도 창피하지 않은 것

하루에 열 번씩 이름을 바꿔도 탄로 나지 않으며

바다와 목재와 지붕의 서로 다른 가치들

지폐와 동전을

손바닥에 모조리 꺼내 놓고

알아서 집어가라고 주인을 뒤바꾸는 것


구기 종목의 관중이 되는 것

구름의 수입과 지출을 헤아리며


아무튼 바퀴와 날짜를 사랑하는 것


- 여행의 리얼리티, 김경미




뉴욕의 스타벅스에서 음료를 만들어주는 파트너가 주문단계에서 나에게 이름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 때 장난기가 발동해서 내가 당시 좋아하는 미드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말했고, 그게 내 진짜 이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의심없이 가짜 이름을 받아 적는 그의 모습은 상당히 신선하고 충격이었다. 

나의 이름이 여행 기간 중 열번이나 바뀌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 사람들. 타지에서 서툰 영어로 음료를 주문하는 것이 뻔해 보일 나는 그들에게 '사실 이름이 뭐든 간에 나랑은 별로 상관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말한 가짜이름이 적힌 봉투를 받아들며 생각했다. 낯선 곳에서의 여행은 내 진짜 모습을 숨길 수 있구나. 그런데 내가 나에게까지 그 모습을 숨길 수는 없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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