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통해 나를 견고하게 만드는 '경합적' 관계의 당연함
내가 되기 위한 남 만들기.
그건 나와 남을 구분짓기 위한 우리집 울타리 세우기와 같다.
교육사회학 시간에 '경합적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내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아닌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교수님의 말씀이었는데, 마치 수학시간에 배웠던 여집합의 이론과 비슷했다.
여집합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의 관계에 침묵이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치고 받으면서 싸우는 관계가 '경합적 관계'이다. 내가 옳고, 너는 그르다는 것. 그르다는 것은 나와 같은 색깔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치 파트 뉴스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그런데, 이런 경합적 관계가 사회에 존재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포함되는 것이 있긴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 있어야한다는 논리이다. 내가 나이기 위해서는, 너가 너여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나이고 너가 너일 때, 우리는 늘 잠재적으로 그들에게 적대감을 갖게 된다. 나와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 나와 가치관이 정반대인 사람, 나와 의견이 안 맞는 사람... 나의 울타리 바깥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세운 내 울타리의 바깥은, 바깥이기 때문에 포함되지 않고, 우리의 기준에서 배제된다. 이런 현상은 사회에서 정말 흔하게 일어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나라, 마을, 학교, 친구, 가족, 그리고 심지어 나 자신 안에서 조차도 끊이지 않는 울타리치기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잠재적으로 적대적인 관계로 가득찬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울타리를 세우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나의 울타리가 나를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부터 지켜주지 않는가. 울타리를 치는 것은 문을 아예 닫는 것이 아니라 남을 구분지음으로써 나를 강화하는 기제이다. 여자와 남자,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또는 양성애자, 실재주의와 구성주의, 보수와 진보, 빨강과 파랑과 같이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양쪽 모두에 발을 담글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여기서 울타리의 경계가 흐려지거나 울타리가 없어진다면? 양극이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양극이 혼재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즉, 울타리 세우기는 우리가 사회의 여러가지 분야에서 맺고 있는 경합적인 관계에서 나를 지키기 위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선이다.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하고 우리의 신념을 지키지 못한다면, 사회는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처럼 이도저도 아닌 것이 될 것이다. 경합적 관계는 사회에서 이토록 당연하고, 또 있어야만 하는 관계인 것이다. 울타리가 없어 광장이 조용한 사회(교수님이 말씀을 빌려보았다)는, 문제가 있는 사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