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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의 결

<하워드 진, 교육을 말하다>를 읽고 나서

by 이정하

우리 모두는 어떤 한 기준에 의거해 생각하는 것에 매우 익숙해서, 그 기준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주류의 것들에 매력을 쉽게 느낀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것에는 신선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낯섦과 이물감, 때로는 공포감을 느끼기도 한다. '지금에서부터 바뀌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생각부터 '지금 체제가 바뀐다면 오히려 혼란이 가중되지 않을까'하는 걱정까지 비주류의 것들에 대한 시선과 생각은 그렇게 따뜻하지 않다.


따뜻한 주류의 역사를 만드는 것은 그 시대와 그 나라의 공권력이다. 사회에 통용되는 절대적인 힘인 공권력은 그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체계의 뿌리에 스며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공권력이 가지는 교묘한 절대성은 공권력의 편에 선 것을 제외한 것들을 이방인으로 만들어버린다. 정치에도 하나의 '여당'과 나머지 '야당'이 존재하고, 문화에도 많은 이들이 즐기고 향유하는 '주류문화'와 소수만이 즐기는 '소수 문화'가 존재한다. 사랑의 유형과 같은 경우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이성애자'라고 믿고 있고, '동성애'와 '양성애'는 소수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푸코(Foucault)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그 시대의 권력은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다. 지배 개념이 되는 이데올로기가 개인 통치의 이념이 될 때, 국가의 지배 이념이 개인에게 적용되었다고 말한다. 현대 사회에서 국가의 지배 이념이 가장 잘 실현되고 있는 곳은 '학교'라고 할 수 있다. 학교에서 교육을 통해 학습자에게 국가의 이념을 전달하고, 시험을 통해 사회에 통용되는 진리를 학습시킴으로써 이미 지배계급의 논리를 전달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현재 학교의 교육은 온전한, 어떤 부동의 것을 목표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객관적일 수도, 객관적일 필요도 없다는 하워드 진의 말처럼, 어떤 '사실'이 하나의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권력관계가 반드시 작용하고, 권력관계가 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관계가 형성하는 담론과 지식이 그 시대를 규정하는 역사를 만들고, 그 이외의 것들은 역사로 규정된 것의 뒤편에 흐르도록 놓아두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통해 권력관계가 형성한 주류가 진리가 되고, 그 진리가 사람들이 통용하는 생각이 될 때, 가장 무서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된다.


'오랫동안 볼수록 아는 건 줄어든다(The More You Watch, the Less You Know)'는 미국의 한 방송인이 언론에 나오는 뉴스와 각종 미디어 자료들은 기업과 정부의 시녀임을 표현하기 위해 쓴 책의 제목이다. 책의 저자는 언론에 많이 노출될수록 진실된 것을 보지 못하고 언론이 제공하는 정보에 찌들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하는데, 여기서 정말 무서운 것은 언론이 제공하는 정보가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언론이 제공하는 정보에 중독된 개인이 언론과 다른 주장을 펴는 비주류에게 공포감과 적대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투명성이 보장되지 않은 언론은 그 파급력과 대중의 신뢰성을 이용해서 어떤 한 사실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을 진리라고 믿게 만들고 국가의 관리에 알맞은 수동적인 개인을 형성한다.


언론과 마찬가지로, 학교의 교육, 특히 역사교육 또한 역사에 하나의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학생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학교가 학생들에게 통제와 강제의 시스템 안에서 제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도록 요구하고, 특히 역사교육 분야에서 한 국가 내에서 개인이 갖는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역사의 여러 담론을 국가의 통치성에 입각해 하나로 압축했기 때문이다. 국가에 대한 복종심을 고취시키고, 독립적인 사고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리는 기능을 학교의 역사교육이 수행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에 실린 문장 하나하나를 의심과 여과 없이 받아들일 때, 한국의 국정교과서와 같은 괴물이 등장하는 것이다.


학교가 제공하는 역사에 대한 지식이 진리라고 말하는 입장은 국가의 입장이다. 시험과 같은 여러 제도를 통해 그를 확립시키고, 하나의 담론이 대중성을 갖게 한다. 그 대중성의 대표적인 목표는 바로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다. 역사교육의 경우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것에 대한 중요성은 더 커진다. 한쪽에 치우친 권력관계에 의한 대중성은 진정한 대중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애국심 자체를 나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닌, 잘못된 역사에 대한 관점으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것에 대한 경계이다. 학교는 국가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주류의 입장이 아닌 비주류의 입장에서의 역사교육을 허용하지 않는다.


늘 친숙하게 바라보았던 어떤 것을 다른 관점에서 낯설게 바라보는 데에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지만, 그 새로운 관점조차 들어갈 틈이 없도록 현재 학교의 교육이 개인을 형성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워 잘 알고 있는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없다. 승자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역사교육은, 사실에 대한 모른 척을 요구해, 결국에는 국민을 통제하기 쉬운 상태로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역사교육으로 대표되는 교육의 총체적인 모습이 학생 개인의 알 권리와 교육받을 권리를 짓밟을 수도 있다.


역사에 무지한 사람도 여전히 역사의 주체이므로 책임이 있다. 그렇지만 역사에 무지한 사람의 책임은 전적으로 그 사람에게 있다고 할 수 없다. 국가는 학교를 통해 국민을 올바르게 교육시킬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주체가 학교에서 역사교육을 배우는 학생들을 포함하므로, 역사교육은 학생의 주체적인 생각을 존중하고 학생들의 비판적인 의견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모든 역사가가 '사실'이라고 불리는 역사를 제시할 때부터,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한 '사실'이 아니게 된다. 사실에는 판단이 끼어들 수밖에 없고, 그 판단 중에는 어떤 사실에 부여되는 중요성의 경중이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학생의 주관적이고 주체적인 판단 또한 존중받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워드 진은 '비주류의 입장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방법은 역사기록과 맥락을 병치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주장한 역사교육의 방법은 다양한 사료를 통해 학생의 맥락적 이해를 돕고, 학생이 역사를 자율적으로, 또는 비판적으로 해석하도록 돕는 것이다. 학생이 주체적으로 역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립하고, 교과서에 적혀있는 것보다 더 멀리 나아가 하나의 의견을 당당히 말할 수 있다면, 주류의 역사교육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시대의 역사를 만드는 주체가 모든 사람이라면, 그를 해석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의 다양성과 다채로움, 그리고 그 주체의 주관적인 의견 또한 존중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주류만을 위한 역사가 아닌, 주류와 비주류가 공존하되 비주류가 주류를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역사, 더 나아가 사회를 만드는 기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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