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 프로필을 예약했다
띠-링. 000 스튜디오로 10만 원을 이체하시겠습니까?
확인.
계좌이체 10만 원. 바디 프로필을 예약했다.
헬스장에 처음 상담을 갔던 날. 지난 몇 달간 경험한 것을 토대로 상담을 했더니 선생님이 "회원님, 바디 프로필 찍을 생각 없으세요?"를 제일 먼저 물어봤었다. 그때만 해도 "아니요. 저는 절대 그런 건 생각이 없어요." 했었는데. 예약금을 보내고 앉았다.
"선생님, 저 프로필 예약했어요."
"진짜요? 언제로요?"
"6월 3일인가, 암튼 그때요"
"알았어요. 잘해봐요."
우발적인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계획적인 것도 아니었다. 10만 원의 계약금을 보내기까지 단 1시간 정도가 걸렸느니 말이다. 오로지 간절함만이 지출과 결단의 동력이 되었을 뿐이었다.
거의 한 달 가까이 나는 매일같이 폭식을 하고 있었다.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헬스장이 문을 닫은 6주 동안에도 홈트로 다이어트에 성공한 나였는데. 심지어 눈바디도 눈에 띄게 달라지고 헬스장이 다시 문을 열 때 즈음엔 최근 몇 년 간 본 적 없는 몸무게를 찍어버렸던 나였는데. 어느 한순간에 와르르. 헬씨 라이프로 쌓아온 내 세상이 무너져버렸다. 인생에서 경험한 첫 번째 폭식증이었다.
폭식에는 단계가 있다. 처음 시작은 냉장고 털이부터. 지난 8-9개월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엄격하게 식단을 지키고 운동을 해온 다이어터라면 냉장고엔 각종 다이어트 식품들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어 닭가슴살, 통밀 식빵, 현미밥, 참치를 비롯해 단맛이 필요할 때 찾는 단백질 바, 프로틴 음료 등이 그것들. '다이어트 식품이니까 괜찮겠지, 칼로리가 낮으니까 괜찮겠지'라고 한번, 두 번이 계속되면 어느새 냉장고는 텅 비어버린다. 비어버린 냉장고는 편의점을 털어서 채운다. 2단계가 시작된 것이다. 2단계가 편의점인 이유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손쉽게 음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단계가 전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인 것이 이때부터는 건강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온갖 '당'을 섭취하게 된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다이어트를 하면서 한번 제대로 먹는 '치팅데이'로도 합리화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다. 편의점에서 획득하는 음식들은 주로 빵, 아이스크림, 과자류이기 때문에 수개월 동안 잊고 있던 '맛의 신세계'를 경험한다. '당'이 들어가는 단맛과 짠맛의 다채로운 향연이 또 당을 부른다. 그러다가 편의점 음식이 질리면 바로 3단계로 진입하는데 나는 이때 처음으로 배달의 민족을 다운로드하였다. 우아한 형제들이 유니콘이 되는 사이에 한 번도 이용해 보지 않았던 잠재고객의 포텐셜이 드디어 터져버려서는 매일같이 배달앱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 치킨, 피자, 족발 등의 고탄수, 고지방, 고단백의 음식이 한상 푸짐하게 깔려있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끼니라고 생각하면서 배가 아플 때까지 때론 배가 찢어질 것 같아도 음식을 계속 꾸겨넣는다. 이런 3단계까지 거쳐오는 사이엔 문제를 인식하면서도 '아, 이번 한 끼만' 하게 되지만 3단계까지 마스터하게 되면 진짜 질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처음엔 이 폭식증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방법을 알지 못했다. 폭식증이 왜 찾아오는지도 알 수가 없고 어떻게 해야 음식을 멈출 수 있는지, 혹은 마구마구 음식을 먹는 나를 어떻게 해야 그만 미워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내가 할 수 있는 결정이라고는 타이트하게 다이어트를 하는 것뿐이었고 타인으로부터의 감시만이 나에게 적용될 수 있는 유일한 잣대라고 확신하면서 바디 프로필을 예약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의미 있는 과정임을 증명하기 위해 더 열심히 운동하고 더 열심히 적게 먹고 더 열심히 알리기로 마음먹었다.
온 마음을 다해 되찾고 싶었다. '이건 질병이니까, 식이장애니까 고쳐야만 해'에서 오는 강박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건강한 나, 헬씨 라이프를 잘 지켜내는 멋진 나'로 돌아오고 싶었다. 그러나 바디 프로필을 예약하고 앞만 보고 힘차게 달려 나가던 그때의 나는 딱 하나 알지 못한 게 있었다. '건강한 나를 되찾으려는 마음은, 건강한 나에 대해 내가 집착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집착하는 마음은 무언가 가슴속 깊이에서 나만 알 수 있는 결핍에서 온다는 것.' 결국 내가 되찾아야 하는 것은 '결핍을 마주하는 나, 결핍을 인정하는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