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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Jun 25. 2023

울 엄마에게 딸이 생겼어요^^

마을의 두 천사 : 신세대 부녀회장과 생활지원사

  다른 날 보다 약간 늦은 오전에 어머니께 문안 인사차 전화를 드렸다. 엄마는 어쩐 일인지 속삭이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동각에 계시다고 하였다. 다른 때 같으면 여러 사람이 같이 있어도 전화를 편하게 받는데 느낌이 이상하였다. 분위기가 약간 가라앉아 있는 듯해 께름칙하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나중에 전화를 다시 하겠다고 말하고 끊었다.


   올해 들어 엄마한테 딸이 둘이나 생겼다. 새로 선출된 마을 부녀회장과 우리 동네 담당 생활지원사. 둘 다 우리 집 막내 동생보다도 나이가 아래인 여성이다. 무엇보다 이것저것 여기저기 잘 챙겨주니 고맙기 이를 데 없다. 엄마는 늦으막에 딸을 얻은 기분이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다섯이나 되는 아들 중 한 명도 옆에 없이 혼자 계시는데 두 분이 수시로 들여다보고 돌봐주니 우리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다. 사실 그분들마을의 모든 어르신들을 돌보고 보살피는 봉사활동을 한다. 나라에서 시행하는 복지서비스 덕분에 객지에 나가 사는 자식들이 한시름 놓게 된 셈이다.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이 있는 이웃이 더 낫다는 옛말이 꼭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것 같아 실감이 났다. 도시보다 특히 시골에 가보면, 우리나라 복지제도가 생각보다 잘 돼있다는 걸 느끼곤 한다. 감사한 일이다.

 

   지난 2월, 구정 설을 며칠 앞두고 엄마가 코로나에 걸려 집에서 혼자 격리생활을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엄마는 급히 자식들에게 전화를 하고 아무도 내려오지 마라고 미리 단속을 하였다. 우리는 멀리서 무기력하게 발만 동동 구르며 지켜볼 뿐 달리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우리 집 일가이기도 한 부녀회장이 날마다 우리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들여다봐주었. 때로는 엄마가 좋아하는 미역국 드시라고 그릇 비닐봉지에 싸서 대문에 살짝 달아매놓고 일터 나가는 날있었다. 심지어는 코로나가 자신에게 옮아도 좋다며 엄마를 부둥켜안고 위로를 주기도 하였다. 그런 정성스러운 도움을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라 나는 우선 전화로만 인사를 하였다. 부녀회장은 오히려 나에게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다부진 목소리로 안심시켜 주었다. 


   최근에는 엄마가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침대발 발가락을 부딪쳐 그중 하나가 부러진 사고가 있었다. 노인이 되면, 사소한 일로 부상당하는 경우가 많다더니 막상 울 엄마가 당하고 보니 난감하고 당혹스러웠다. 당장에 가봐야 마땅한 일인데도 별일 아니고 괜찮다는 엄마 말만 믿고 사태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부녀회장이 어머니를 모시고 읍내에 있는 병원을 다녀왔다. 정형외과도 가고 기왕 간 김에 피부과도 들렀다. 진단과 치료를 충분히 받을 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도와주었다. 현장의 진행상황과 의사 선생님의 주의사항을 참고하라며 나에게도 전화로 알려주었다. , 세상에 이런 사람이 다 있을까! 감동이었다.


   생활지원사는 일주일에 세 번 온다. 한 번 올 때면 몇 집씩 나누어 개별적으로 방문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지만 마을의 어르신들 대부분이 낮이면 동각에 나와 함께 있으니 올 때마다 한꺼번에 보고 가는 날이 많다. 혹시나 회관에 안 나오고 집에 계시는 분은 물론 집으로 찾아가서 안부를 살핀다. 작년까지는 돌봄 아줌마라고 불렀는데 올해는 다시 사람이 바뀌고 이름도 생활지원사로 불러달라고 하였다.


   새로 온 생활지원사가 어머니 집에 처음 들르던 날, 우리 오 형제 단톡방에서 어머니 이름으로 자기소개 겸 인사를 하였다. 앞으로 자신이 우리 엄마 딸 하기로 했단다. 성격이 낫낫하고 명랑해 보였다. 우리 형제들은 독수리 오 형제 오빠들이라 부르겠으니 허락해 달라고도 하였다.^^ 딸 없이 자란 우리는 하나같이 엄청 반기며 쌍수로 환영하였다. 생활지원사 역시 부녀회장처럼 어머니 모시고 읍내로 병원에 다녀온 일도 있었다. 엄마의 입맛을 알고 전복미역국을 직접 끓여 온 날, 그것을 사진으로 보여주기도 하였다. 병원에 같이 가던 날, 생활지원사는 어르신을 모시고 마을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 거라며 어머니께 입조심을 당부하였다.

 

   엄마에게 다시 전화를 했더니 마을회관(동각) 분위기가 좀 냉랭하고 안 좋다고 하였다. 어제 신계댁이 무거운 짐을 들고 오는 것을 보고 생활지원사가 달려가 들어주었는데 호동댁이 그 일을 들먹이며 투덜거렸다는 것이다. 94세인 호동댁은 생활지원사가 그런 일을 하려면 자기를 먼저 도와줘야지 왜 자기 보다 두 살 어린 사람만 도와주는 거냐. 지난번 나는 짐을 안 들어줬지 않냐며 역정을 냈다는 이야기였다. 대부분 한 집에 노인 한 사람만 사는 처지인지라 그 연세에 직접 일을 하는 게 힘겨웠을 법도 하였다. 생활지원사 입장이 난처해졌다. 읍사무소 담당자도 마을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날마다 동각에 모여 한담을 나누며 같이 지내는 사이지만, 사실 어르신들 사이에는 모종의 라이벌 관계가 있다. 수반댁도 유달리 울 엄마 신정댁에 대한 시기심이 많다.^^ 다음날, 사무소 공무원이 생활지원사와 동행해 마을을 방문하였다. 앞으로는 생활지원사가 본연의 돌봄 역할만 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절대로 개별적으로 도와주는 일을 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돌아갔다. 노인들의 치기 어린 시기심으로 인하여 분위기가 더 이상해졌다. 엄마는 그런 사태를 안타까워했다. 그렇더라도 싹싹한 부녀회장과 명랑한 생활보호사가 어르신들 곁에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다. 멀리 객지에 나가 어머니와 떨어져 사는 우리에게 천사나 다름없는 고마운 분들이 아닐 수 없다. 고향 마을에 온정과 평온이 깃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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