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제주도에 여행을 떠난이들에게 일어난 환상적인 세가지 이야기
두번째. 기 억 여 행 _ 6
기억을 더듬으며 길을 걷다 보니
아내가 뛰어갔던 나무 숲이 나왔다.
나무 사이로 뛰어가던
그동안 그들을 멀리하고 힘들어했던 건 나인데 형근이는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설마 희정이가 나를 사랑한 건가, 그래서 여기서 따지고 있는 건가, 의문이 들어 한참 형근이의 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형근이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슬퍼 보였다.
따뜻하고 슬픈 눈, 형근이는 항상 나를 그렇게 바라봤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더 슬퍼 보이는 형근의 눈빛에 빠져들려는 찰나에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날카로운 그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희정이가 숨을 헉헉거리며 서있었다.
우리를 뒤쫓아 온 모양이었다. 희정이의 표정은 무척 화가 나있었다.
“내가 얘기하지 말랬지? 두 사람은 안 된다고 했잖아. 왜 내가 아니라 범준이어야 하냐고?”
희정이는 우리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와 형근이가 들고 있던 돌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의 대상을 향해 돌을 쥔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희정이가 내리찍는 돌은 형근이가 아니라 나를 향해 있었다.
깜짝 놀란 형근이는 몸을 던져 나를 감싸 안아 희정이가 내리치는 돌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냈다.
형근이와 나는 그렇게 그날 산 아래로 떨어졌던 것이다. 피를 흘리던 형근이는 나에게 속삭였었다.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 다 잊어.”
내 기억은 어느 순간 갑자기 돌아온다고 했던가.
나는 외진 리조트 앞 해안 절벽 위에서 아내와 맞대어 서 있게 되자 그날의 기억이 다 떠올랐었다.
“아, 희정아. 내가 형근이와 절벽 아래로 떨어진 건, 나 때문이 아니구나.”
아내는 내 멱살을 잡아 뒤흔들었다.
“왜 이제야 기억이 난 거야? 옆에서 평생 맘 졸이며 살다가 이제는 편해지나 싶었는데 왜 다 늙어서 기억이 나는 거야?”
나는 또다시 바람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형근이와 함께 있던 그 마지막의 산등성이에 불던 바람 같은,
사납지만 따뜻하게 느껴지던 그 바람 같았다.
몸에서 힘이 빠지고 나는 소리도 지르지 않은 채 아내를 껴안고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졌었다.
같이 굴러 떨어질 때 아내의 목소리가 낮게 그리고 굵게 귓가에 들렸다.
“다 잊어. 제발.”
마치 형근이가 죽기 전 나에게 했던 말처럼 들렸다.
정신을 차린 아내는 신음하는 나를 두고 뒤도 안 돌아 보고 떠나갔다.
아내의 뒷모습이 예전에 형근이와 나를 버리고 뛰어가던 그때처럼 여전히 냉정하다.
아내는 실종이 아니라 나를 떠난 것이다.
그녀가 나와 결혼한 이유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닌 언젠가 기억날지 모르는 범죄의 감시 때문이었다면, 그것이 그녀에게 큰 형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의 선택은 나에게도 내 인생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너무나 큰 상처가 되었다.
기억이 돌아올수록 서로에게 고통스럽고 잔인한 일들뿐이니, 차라리 정신이 온전치 못한 채 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가족들에게 아니, 세상에서 이 모든 것은 감춰져야 할 것이다.
모든 기억이 나고 세상이 정지된 듯 했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게 있자 아들은 나를 이끌어 차에 태웠다.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요양병원으로 가게 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내 치매증상은 어떻게 될지, 기억이 이렇게 계속 왔다갔다 할 건지 의사에게 물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내 얘기를 듣던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깨어나시고 이미 병원에 다녀오셨어요. 사고가 난 것을 기억 못 하시고 예전에 어머니에게 들은 얘기도 있어서 당연히 치매일 것이라 생각했죠. 그렇지만 아버지는 단지 기억에 장애가 있으실 뿐이었어요. 의사는 아버지가 상처받은 기억들을 머릿속에서 지우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치매가 아니라니, 내가 기억 못 하는 일이 상처받은 기억이라는 걸 어떻게 아는 거냐고 했더니 아들은 나에게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나열했다.
“제가 군대에서 사고 났었던 것 기억나세요? 할머니 임종 못 보셔서 힘들어하셨던 건요? 로미가 세상 떠나던 날도 기억 안 나시죠? 퇴직하시고 며칠을 앓으셨던 건요? 그러니까 아버지 인생에서 슬펐던 일들 다 기억나세요?”
그 일들은 최근 내가 기억이 나기 시작한 일들이었다.
만약 내가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내는 내 옆에서 견디고 살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를 기억해 내는 내 옆에서 아내는 완벽한 증거를 가진 증인을 앞에 둔 피고인 같았을 것이다. 그런 내 옆에서 아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라지는 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이 계속 난다면 나는 평생을 아내를 찾아다니고, 사라진 그들이 나를 괴롭힐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혹시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찾아다닌 것은 아내가 아니라 형근이가 아닐까 의문이 들었다.
생각에 과부하가 걸린 나는 갑자기 차 안에서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낮잠이 들었다 깨어났다.
잠에서 깨어나자 심장이 두근거리고 눈물이 나왔는데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아들이 ‘아까 친구분 얘기 이어서 해주실 수 있으세요?’ 라고 했지만 나는 ‘무슨 친구?’ 라고 대답했다.
내가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인 것이 모두에게 평화를 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아내는 무조건 실종된 사람이어야 했다. 길게 잠을 자고 싶어졌다.
아들의 부축으로 집에 돌아와서 나는 스스로 이불을 깔고 누웠다. 아들이 헐겁게 걸쳐진 이불을 끌어올려 주며 말한다.
“아버지는 예전부터 힘든 일이 있어도 한잠 주무시면 다 잊고 지내시던 분이셨어요.”
잠들고 일어나면 다 잊을 수 있다니 너무나 축복 같은 일이었다.
나는 밤이 오길 기다린 사람처럼 서둘러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아오자 벌떡 일어난 나는 혼자 말했다.
“여기가 어디지?”
두번째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세번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