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제주도에 여행을 떠난이들에게 일어난 환상적인 세가지 이야기
두번째. 기 억 여 행 _ 5
기억을 더듬으며 길을 걷다 보니
아내가 뛰어갔던 나무 숲이 나왔다.
나무 사이로 뛰어가던
그날은 아침부터 형근이에게 전화가 왔었다.
희정이와 사귀면서부터는 나를 빼고 둘만 등산을 즐기던 놈이었는데 왜 갑자기 등산을 가자고 한 건지 의아했지만 모처럼 반갑기도 했었다.
'희정이는 어쩌고 왜?' 라고 하자 형근이는 이제 취업을 하면 시간이 없을 테니
모처럼 같이 등산을 가자고 했다.
나는 공무원시험 준비 중이었고, 형근이는 모 대기업에 입사 예정이었다.
그때는 대기업에 들어갔다는 것이 공무원보다 더 대접을 받았었기 때문에 은근 부럽기도 했었다.
산을 오르던 우리 둘은 역시나 한숨을 돌리며 한 나무 앞에 섰다.
그 곳은 예전에 희정이와 같이 셋이 등산을 왔다가 희정이가 낙서를 했던 나무 앞이었다.
'형근♡희정'
형근이는 한참 동안 그 낙서를 보고 있었다.
“이렇게 새겨지면 나무가 없어지기 전까지 안 지워지는 거겠지?”
형근이의 표정이 내내 어두워 보여서 사랑싸움을 했구나 생각했다.
희정이를 포기하고 나는 여지껏 홀로 공부만 하고 있는데 둘은 내 마음도 모르고
사랑싸움이나 했구나 짜증이 나기도 했다.
희정이는 왜 형근이를 좋아했을까? 내가 먼저 동아리에서 희정이를 처음 보고
계속 희정이 주변을 맴돌 때마다 형근이는 내 옆에 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형근이와 희정이가 사귀면서부터 우정과 사랑 앞에서 둘 다 형근이에게서 패배한 듯한 감정이 날 힘들게 했지만, 나는 기특하게도 그들을 알아서 멀리하고 외롭게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면서 그 감정을 잘 이겨내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날 등산을 하고 몸이 힘들어서 잠시 정신줄을 놨던 것일까.
날이 추워지고 산등성이를 휘돌던 바람이 눈발과 함께 우리 둘을 스치고 있었다.
잠시 휘청거리는 형근이는 내 팔을 붙잡았었고 나는 뿌리쳤었다.
아마 그때 형근이와 내가 절벽에서 떨어진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면, 선인장에 낙서를 하는 아내에게 소리친 것이 아니라 과거의 그날 내가 형근이의 손을 뿌리쳐서 사고가 난 것을 사과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빠르게 걸어가는 아내의 뒤를 따라붙었었다.
“형근이와 당신이 낙서했던 그 나무 앞에서 서 있었는데.......”
나를 앞서가던 아내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었다.
아내의 등 뒤에는 형근이가 떨어졌던 절벽보다 더 높은 해안절벽이 있었다.
날이 저물어 가고 밤의 기운에 날은 추워지고 있었다. 형근이와 나를 흔들게 했던 바람처럼 아내와 나 사이에도 바람이 불었다.
아내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꼭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가 일부러 형근이를 뿌리친 게 아니라는 걸 말하고, 그보다 먼저 희정이를 봤을 때 그 떨림, 형근이와 데이트하는 걸 봤을 때의 절망감, 모든 일이 잘 풀리는 형근이를 옆에서 지켜보는 내 열등감을 말해야 그날의 사건을 아내는 이해해 줄 것 같았다.
30여 년간 나와 함께한 아내였는데 내 말을 이해해 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내는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듯 귀를 막고 소리쳤다.
“내가 당신과 몇 십 년을 살았잖아. 형근 씨 이야기는 입에도 담지 않던 당신이 갑자기 왜 그래?”
“미안해. 하필 당신이 낙서했던 그 나무 아래로 떨어져서 형근이가 그렇게 됐잖아. 지금 나는 기억을 잃어 가는데 그렇게 오래전 일이 왜 이제 생각이 나지?”
아내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희정아, 다 오해야 이상한 생각하지 마.”
나는 점점 아내에게 다가갔다. 형근이가 그렇게 된 건 나 때문이 아니라는 말을 해야 했다.
그런데 아내는 뜻밖의 말을 했다.
“형근 씨가 떨어져 죽은 절벽 위에 그 나무가 있었다는 건 당신밖에 몰랐어!”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절벽 위에 그 나무가 있었다는걸 나밖에 모른다면 아내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지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힌트였는지 나무 앞에 형근이와 나 그리고 희정이, 셋이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왔다.
“그런데 당신도 거기서 우리가 떨어지는 걸 봤잖아? 왜 나밖에 모른다고 해?”
아내는 점점 뒤로 물러서서 절벽 끝으로 가더니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왜 아내를 힘들게 하고 두려움에 떨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내가 벼랑 끝으로 갈수록 바람이 더 세게 불었다.
마치 형근이가 죽었던 그날 불었던 바람처럼.
바람이 그렇게 불더니 나무 옆에 서 있던 형근이는 휘청거리며 내 팔을 잡았었다.
딴생각을 하던 나는 순간적으로 놀래서 형근이를 뿌리쳤는데 형근이는 짜증을 내지도 않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었다. 그리고 형근이는 곧바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날카로운 돌을 하나 주웠다.
형근이는 그 돌의 날카로운 부분을 희정이가 남긴 낙서에 문질렀다.
나무에 새겨진 낙서는 형근이가 든 돌의 날카로운 모서리로 인해 지워지고 있었다.
순간 무서워진 나는 형근이랑 희정이랑 다퉜다고 예상했다.
나는 여기다 화풀이 하지 말라고 말하며 형근이를 말렸다.
그런데 형근이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다 너 때문이야.”
6편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