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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섬 Oct 02. 2024

[단편소설] 네가 여행을 떠난다면 07

어느 날, 제주도에 여행을 떠난이들에게 일어난 환상적인 세가지 이야기

두번째. 기 억 여 행 _ 4


기억을 더듬으며 길을 걷다 보니

아내가 뛰어갔던 나무 숲이 나왔다.

나무 사이로 뛰어가던



 아들은 경찰관 앞에 앉아 나에게 벌어진 일들을 말했다.

 아들의 말대로라면 작년 봄 나와 아내는 제주도 여행 온 것이 맞다.

 둘이서 올레길을 걷는 중에 사고가 난 건지 나는 절벽 아래에서 발견이 되었고 아내는 실종되었다.

 아내를 찾을 모든 단서는 나에게 있는데 나는 한동안 깨어나지 못 했나보다. 그래서 아내의 실종은 난관에 부딪힌 채 갈 길을 잃었다.


 아들은 그 사이에 이곳으로 직장을 옮긴 모양이다. 정신 못 차리는 나를 간호하며 실종된 엄마를 찾으려 힘들게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나 보다. 아들의 병간호 덕인지 얼마 전 나는 병상에서 깨어났지만, 사고가 난 그날의 기억을 다 잊어버리고 살고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결국 마지막까지 숨기려 했지만 아들도 세상도 내가 치매인 걸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가 사고 이후에 계속 깨어나지 않으셨어요.

  그러다 한 달 전쯤 갑자기 깨어나시고 일상생활은 가능하셨는데

  사고에 대한 기억은 안 나시는 것 같았어요.

  집에 모시고 있었는데 며칠 전 갑자기 사라지셔서 한참을 찾고 있었어요.”


 아들이 하고 있는 얘기를 듣고 있으니 며칠 전 아침 며느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잠에서 덜 깬 나는 부엌에서 아침을 차리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너무나 반가워했다.

 “희정아, 안 다쳤어? 괜찮아?”

 라고 불렀더니, 며느리가 뒤돌아 나를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당황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아, 아니다.” 라고 며느리를 안심시키고 나는 몰래 집을 나왔고

 잃어버린 아내를 찾으러 다시 리조트로 왔었던 것이다.


 나와 함께 리조트로 돌아와 짐을 챙기는 아들에게 오늘밤 여기서 자고 내일 가고 싶다고 얘기했다.

 아들은 내가 며느리를 보기 민망해서 그럴 거라 생각했는지 “와이프는 다 이해하니까 걱정 마세요.” 라고 말하고는 여유분의 이불을 깔고 잠들었다.

 사실 며느리에게 민망했던 건 아니다.

 그보다는 며느리가 놀라는 눈빛에서 걱정이 아닌 두려움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 눈빛은 나에 대한 두려움일 수 있지만, 아내가 나를 쳐다보던 눈빛 같기도 했다.

 아내를 찾기 전까지는 그 두려움의 눈빛은 계속 나를 따라다닐 게 분명했다.

 평생 그런 눈빛을 받으며 살 자신이 없다. 그래서 아내를 찾기 전까지 난 여기를 떠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다음날 아침 나는 또다시 기억을 잃은 채 아내를 찾으러 다녔다.

프론트에 가서 아내를 본적이 있냐고 물어볼 뻔 했다가 직원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기겁을 하는 것을 보고 어제 내가 경찰과 프론트에 왔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아내와 올레길에서 싸웠던 기억까지 생각이 났다.

 내가 아내를 찾기 위한 과정은 조금씩 진도가 나가고 있고, 그에 따라 기억도 한 단계 나아가서 기억나고 있었다.

 이렇게 내 기억을 연장시키다 보면 곧 아내를 찾을 수 있을지 않을까 싶었다.

 아들에게 아내와 걸었던 올레길 근처를 걸어봤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아내와 올레길에서 마지막으로 끝났던 기억만 있었던 내가 그 장소에 다시 가 본다는 건

아내를 찾을 새로운 단서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에 아들은 기대를 하는 듯 했다.

 기억을 더듬으며 길을 걷다 보니 아내가 뛰어갔던 나무 숲이 나왔다.

 나무 사이로 뛰어가던 아내의 모습이 아른 거리는 것 같다.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쳐 걷다 보니 아내가 쪼그리고 있었던 그 선인장 덤불이 나온다.

 그 때는 가시만 뾰족하게 있던 백년초 선인장이 지금은 붉은 열매를 맺고 여기저기 퍼져 있었다.


 혹시나 그 낙서가 있을까 하고 선인장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구석에 넓은 잎을 펼치고 자라고 있는 한 선인장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선인장에 새겨진 아내의 낙서가 보였다.

 글자는 갈색으로 물들고 연두빛 새 살이 돋아서 알아볼 수 없었지만 아내의 낙서가 확실했다.


 “여기 이 선인장에 네 엄마가 낙서를 했는데, 내가 화를 냈었단다.”

 아들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범준♡희정’ 그 낙서를 더듬는 나를 보며 도현이가 질문을 했다.


 “그런데 아버지! 어머니가 잘한 행동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좋아서 그런 낙서를 하셨는데

 왜 그렇게 화를 내셨어요?”

 아들의 질문은 간단한 거였지만, 선뜻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왜 내가 화를 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나는 아내가 삐졌거나 화가 나서 나에게서 사라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생각은 아내가 실종된 이유에는 내가 화를 낸 것이 아니라 화를 내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더 큰 이유이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형근이의 기억 때문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설마 과거의 형근이와 희정이를 질투해서 아내를 내가 어떻게 한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내가 살짝 두려워졌다. 그렇지만 만약 그랬다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아내를 이렇게 찾으러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아내를 이렇게 찾으러 다니는 건 내가 아내에게 못쓸 짓을 저질러서는 아닐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서둘러 기억을 잃어버리기 전에 그 날에 대해서 아들에게 설명해야 했다.


 “예전에 형근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사고가 났었지.”

 “네. 예전에 아버지가 말씀해 주셨잖아요. 아버지랑 친한 친구.

  아버지랑 같이 산에서 조난 당해서 돌아가셨던 친구 분이요.

  아버지는 그때 기억이 없으시다면서요.”


  맞다. 나는 형근이가 사망한 그 때의 기억이 없는 채로 살았다.

  그런데 나는 형근이와 사고가 났던 그날이 하필 아내가 이 선인장 앞에서 낙서를 하던 날 갑자기 기억이 났던 것이다.


 나에게 화가 나면 획 사라져 연락을 하지 않던 아내는 웬일인지 그날 나를 떠나지 않았다.

 걷던 올레길을 돌아와 숙소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아내의 뒤를 따라갔었다.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나는 어떤 이유인지 입을 열지 않았었다.

 아마도 젊은 날 나의 괜한 자존심과 내가 형근이에게 가졌던 찌질한 질투를 들킬 것만 같아서였을까.


 그쯤이면 나는 생각을 멈춰도 될 텐데 점점 머릿속에는

 ‘형근♡희정’, ‘범준♡희정’ 글씨가 번갈아가며 아른거렸었다.


 그래. 형근이가 죽던 날, 우리는 희정이가 낙서를 했던 그 나무 옆에 같이 서 있었다. 




8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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