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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섬 Oct 07. 2024

[단편소설] 네가 여행을 떠난다면 10

어느 날, 제주도에 여행을 떠난이들에게 일어난 환상적인 세가지 이야기

세번째. 여행을 만드는 책 _ 1



 보세요.

 지금 제가 살아있는 걸 느끼는데

 이게 현실이 아니면 뭐에요?





 “위암 4기입니다. 수술도 어렵습니다. 예상 수명은 3개월 정도입니다.

  길어야 5~6개월이고요. 저희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일단 주변 분들과 잘 상의 하세요.”


  의사의 말은 환자를 배려하는 것 같았지만 ARS에 나오는 안내 멘트처럼 건조하게 들렸다.

  ‘주변 분들과’ 라는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현실이 믿기지 않은 다윤은 병원 앞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지난 몇 개월간 속이 불편했다. 과식해서, 야식을 먹어서, 매운 음식을 먹어서,

  김 팀장이 새로운 시안이 안 나온다고 지랄을 해서 스트레스를 받아 속이 안 좋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며칠 전부터는 체한 기운이 가시지 않고 등부터 배까지 얼얼했다.

  회사에서는 마감이 다가오고 있어서 더 이상 아프면 일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았다.

  역류성 식도염을 의심하며 처방전이 내려진 약이나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반차를 내어 갔던 병원에서는 큰 병원을 가보라며 직접 예약까지 해줬다.

 친절한 동네 의사구나 감탄하고 큰 병원에 찾아갔더니 지루한 검사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결국 이런 진단이 나오고 말았다.


 갑자기 세상이 잿빛으로 변하고 다윤의 인생은 내리막에 서 있었다.

 그런데 병원 입구의 게시판에는 어울리지 않게 여행사의 휴양지 홍보 포스터가 있었다.

 포스터에는 햇빛이 쏟아지는 해변의 리조트에서 여유를 즐기는 여인이 있었다.

 저런 광고가 왜 병원에 붙어 있는 걸까 의아했다.

 오랜 검사 탓에 시간이 한참 지났고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다윤은 뒤늦게 회사로 출근을 했다. 출근이 늦어서 죄송하다고 말하고 김 팀장에게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쉬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김 팀장은 후임자를 뽑을 때까지 회사를 다니라고 했다.


 때마침 친구와의 술 약속을 기다리며 사장실에서 고스톱 게임을 하던 사장의 귀에

이런 대화가 들렸고, 김 팀장은 문을 박차고 나온 사장에게 인정머리가 없다고 쌍욕을 얻어먹었다.

 사실 사장이 인간적이라서보다는 사장의 어머니가 얼마 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셨기에

다윤이가 사장에게 동정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다행히 하루 만에 회사를 관뒀고 다음날 한 달 치의 월급과 7년 치의 퇴직금까지 통장에 들어왔다.

 그렇지만 차라리 회사를 다니면서 일을 하는 것이 평화였겠다 싶게 괴로운 날들이 시작되었다.

 누구 하나 옆에서 위로해줄 이가 없었기에, 혼자서 며칠 동안 감정이 엉망진창인 날들을

보내다가 결국 정신력이 버티지 못하고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냈다.


 그녀가 지은 죄라고 해봤자 주머니에서 흘러내린 휴지를 줍지 않고 모른 척 가던 길을 갔던 정도의

일들 밖에 없었는데, 그런 일들에 비해 그녀에게 가해진 운명은 너무나 가혹하다며

하루에 몇 번씩 통곡을 했다. 내가 왜? 라는 생각이 들어서 억울하고 슬펐지만

불쌍하게도 힘든 시간은 오로지 혼자와의 싸움이었다.

 어릴 적에 돌아가신 엄마와 가정을 등지고 어디서 살고 있는지 모를 아버지는

그녀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위로를 받을 수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홀로 고민하고 홀로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어느 날 아침엔 기분이 갑자기 나아져서 그래도 남은 인생 잘 마무리하고 살아야지,

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가, 비오는 새벽에 갑자기 깨어나 자신의 저주를 받아줄 대상인

김 팀장을 죽이러 가겠다고 울며 발악을 했었다.

 잠시 진정되다가도 또다시 억울하고 슬프고 해탈하기를 반복하던 다윤의 머릿속에

문득 병원 앞에 붙어있던 여행사의 포스터가 떠올랐다.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고 나온 슬픈 순간에도 왜 병원에 여행사 광고가 있는지 의아했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그 것은 여행이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가 자신에게 주는 선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저격한 틈새 광고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방법, 그것은 여행’


 라고 써져 있는 건 어쩌면 죽기 전에 여행이나 한번 가보라는 반어적인 의미였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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