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섬섬 Sep 25. 2024

[단편소설] 네가 여행을 떠난다면 04

어느 날, 제주도에 여행을 떠난이들에게 일어난 환상적인 세가지 이야기

두번째. 기 억 여 행 _ 1


기억을 더듬으며 길을 걷다 보니

아내가 뛰어갔던 나무 숲이 나왔다.

나무 사이로 뛰어가던

아내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아내, 도현엄마, 그러니까 희정이가 갑자기 사라졌다.

 언제부터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녀가 없는 걸 알게 된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아내는 잠들기 전 편도선이 약해 아침마다 기침하는 나를 위해 머그컵에 물을 받아 놓았다.

 그리고 나는 오늘 아침에 멍하게 깨어나 머그컵을 건드릴까 조심하며 접어놓은 안경을 펼쳐 쓰고 물 컵을 찾았지만 안경 옆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아내가 나를 늘 잘 챙기거나 철두철미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래서 어제는 아내가 깜빡했구나 생각하고 침대에서 나와 정수기가 있는 부엌으로 향하려고 했다.


 그러나 부엌이 있어야 할 곳은 하얀 벽으로 막혀 있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낯선 침대에는 나 혼자 잠들었던 오른쪽자리만 이불이 어지럽혀 있었다.

 방은 집과 달리 월넛의 클래식한 가구가 놓인 낯설지만 익숙한 곳이었다. 두리번거리다 현관 옆에 꽂힌 카드키를 살펴보니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아내와 여행을 오면 항상 묵는 리조트였다.


 그리고 어제의 일들이 생각났다. 우리 부부는 아내의 환갑을 맞아 제주도에 여행을 왔고, 이 리조트에 묵고 있는 중이다.

 가늘게 빛이 새들어오는 암막커튼을 젖히니 내가 묵고 있는 방 층수보다 크게 자란 야자수와 끝이 안 보이는 검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햇빛이 쨍하게 머릿속에 들어오며 파노라마가 펼쳐지듯 아내와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제 아내와 나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높은 절벽과 거친 파도가 보이는 풍경이 좋은 이 리조트에 왔다. 그리고 올레 5코스 길을 조금 걸었다. 절벽 길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나무수풀이 나온다. 예전에 걸었던 길인데도 아내는 또 걷는 이 길을 좋아했다.

 “여기서 보면 저기 나뭇가지 뒤 배경이 한반도 지도 같아! 신기하지?”

 라고 들뜨게 말하던 아내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게 아내가 옆에 있었는데 지금은 나 혼자다.

 장롱과 화장대를 뒤져보았지만 아내의 물건들이 없다. 언제부터 아내가 없어진 것일까?


 아내에게 핸드폰으로 연락을 해보았지만 전원이 꺼져 있다. 서둘러 옷을 입고 프론트에 갔다.

 단정히 유니폼을 차려입은 직원에게 가서 혹시 60대의 여성이 새벽녘에 외출한 걸 본적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아마도 베이지색 등산 모자를 쓰고 노란색 티셔츠에 하늘색 꽃무늬바지를 입었을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리조트 직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워낙 사람의 출입이 잦은 곳이라 일일이 기억하기 어렵다고 대답했다. 지금은 평일의 봄이고 손님도 그리 많지 않은데 왜 기억을 하지 못할까 의문이 잠깐 들었지만 모른다고 하니 더 캐물어 볼 수는 없었다.


 아들 도현에게 전화를 해볼까 생각했지만 망설여졌다. 요즘 나에게 닥친 일들을 다 설명하면 아들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 사실 몇 개월 전부터 나는 동네에서 길을 잘 못 찾거나,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기억하지 못 하는 일이 잦아졌었다.


 저녁뉴스를 보다가 우리가 저녁을 먹었는지 물어봤었고, 최근에는 오래 전에 무지개다리를 건넌 고양이 로미가 집에서 안 보여서 가출을 했는지 알고 반나절동안 찾아다닌 적도 있다.


 그렇게 한참 로미를 찾다가 차 밑에서 누군가 준 참치 캔을 홀짝홀짝 먹고 있던 늙어 보이는 길고양이와 눈이 마주치자 기억이 돌아왔다.


 비 오던 날 아파트 주차장에서 어미를 잃은 채 우엉우엉 울고 있던 로미, 아들을 군대로 보내고 울고 있던 아내에게 다가가 엉덩이를 대고 골골거리는 소리를 내며 위로해 주던 로미, 늙어서 털이 빠지고 피부병이 생기고 혀를 내민 채 누워만 있던 로미가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TV옆 장식장에 있는 로미의 유골함을 보았다. 옆에는 햇볕이 내리쬐는 바닥에서 식빵자세를 하고 있는 로미의 사진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한참 전 일인데 갑자기 닥친 죽음처럼 로미가 너무 보고 싶고 괴로웠었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이 얼마나 더 생길까 두려움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어떤 날은 아들 도현이가 결혼한 것도 잊어버려 아들의 빈 방을 보고는 군대를 갔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도현이 제대일이 언제지?” 하고 아내에게 물어봤을 때 아내는 개던 빨래를 접고 멈칫했었다. 희한하게 내가 그렇게 묻자마자 내 아들이 이미 결혼해서 손주가 돌잔치까지 했음이 기억났다.

 아내가 놀랠까봐 농담이라고 했지만 아내는 이미 예전부터 내가 이상해진 것을 눈치 챈 듯 했었다.


 아내가 60세가 되기 일주일 정도를 앞둔 아침 나는 넥타이를 매고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년퇴임을 한지 1년이 지났는데 말이었다. 놀란 아내가 내 어깨를 조용히 껴안으며 “어쩌지 여보?” 라며 흐느끼고 나도 같이 울었다. 기억은 늘 아차 싶을 때 순식간에 돌아왔었다.


 정상이 아니다. 병원에 가봐야 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드는 것, 그리고 언제든지 인생이 지금보다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을 인생을 살아온 세월에서 충분히 학습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기억이 사라지면 소중한 것들도 흩어질 수 있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생이 송두리째 사라질 것만 같았다. 아니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다. 내가 아니라 아내를, 가족들을 위해서 모든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더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싶었다.


 조만간 병원에 가봐야 한다. 그 전에 아내와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아마 나는 병원에서 정확한 진단을 받으면 분명히 절망하고 여행 다닐 생각도 못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내와 가끔 가던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었다.


 그렇게 비통한 마음을 가지고 제주도에 왔는데 아내가 없어졌다니. 아들 도현에게는 더더욱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사실 네 아버지가 치매가 온 것 같고, 그 전에 마지막으로 여행을 왔는데 엄마를 잃어버렸다, 라는 말은 나에게는 너무 비참하고 아들에게는 가혹했다.


 일단 기억을 더듬어 아내와 내가 어떻게 된 것인지 찾아내려 애썼다.

 우리 부부는 사소한 것으로 자주 다투고 화해를 하는 편이다. 혹시나 어제 말다툼을 하고 난 뒤 아내가 삐져서 밖으로 나갔는데 내가 잊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적어도 오늘 하루만이라도 아내를 내 힘으로 찾아봐야 할 터다.


 방으로 돌아와 먼저 무엇을 할지 고민을 했다. 아내를 찾아 일단 나가야 했다. 자동차 열쇠를 화장대에 올려놓는 버릇을 떠올리며 보니, 낡은 화장대에는 렌트한 차량의 열쇠가 있었고 주차장에서 손쉽게 렌트카를 찾았다.

 아내도 운전을 할 줄 아는데 그냥 나간 것을 보면 근처 가까운 곳에서 내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었을 적에 연애하던 시절부터 아내는 삐지면 자리를 박차고 나간 적이 많았고, 과장해서 말하자면 평생 나는 아내를 찾아다녔으니까 이번에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5편이 이어집니다

작가의 이전글 가족의 주변인처럼 맴도는 우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