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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May 31. 2024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법

경애라고

이름을 부르면 고요해진다.

나야, 누가 대답을 할까?

기다린다.


나와 대화한다는 건 실체가 있음을 의미한다.

늘 언제나 느껴지는 지금의 나와는

대화라기보다는 인식만 하면 된다.


지금 여기 함께 느껴지는 나

하지만

경애라는 이름을 부르면 나라는 실체가 나타나야 한다.

참나라는 나는 지금 이 순간이라는 찰나 속에 산다.

대화라는 걸 할 필요조차도 없다.

경애라는 이름을 부르는 바로 그 나가 참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나는 관찰하는 나! 인식하는 나! 깨어있는 나!  알아차리는 나!

나라는 직관적인 나이지 사유하는 내가 아니다.

결국 이름을 불렀을 때의  대답하는  나는 내 안의

자아들 에고라고 부르는 자아들 중 하나의 자아들이다.

바로 과거 속 기억들이다.


1초 전의 나 10분 전의 나 1시간 전의 나 어제의 나

지나간 과거의 나에게 말을 건넨다.


자아들은 유령처럼 내면에서 맴돈다.

 감기가 어제 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몸은 아프다. 다시 콧물이 수도꼭지처럼 줄줄 흐른다.


요즘은 여전히 바쁘고 쌓여있는 일들이 쉽게 풀리지 않고 시간만 잔뜩 잡아먹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  하루종일 긴장감 있는 하루를 보낸다.


지금은 다 잊고 고요해진 어제의 자아들에게 묻는다.

넌 요즘  왜 그렇게 허둥지둥거리면서 불안해했던 거니?

그게 그렇게 갑갑하고, 답답하고, 짜증 났던 거니?

라고 물어본다.


아무 말이 없다.  요즘의  나는 임팩트가 없어서일까?  나라는 실체로 남아 있지 않아서 인지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피처철이가 나타나서 대답한다.


나야  요즘 조급한 마음에 내가 그 못살게 좀 달달 볶았던 거 같은데...


그렇구나.  너였구나..... 미안 내가 요즘 경황이 없어서 네가 있다는 걸 몰랐어.


독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린 시절 동화 속에 나오는 고래를 상상하면서

상상 속 친구가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고 모든 여가생활이 자기계발로 채워지고 나서부터 잠깐의 짬이 나면

 영어단어를 암기하고, 지식을 습득하고,

아주 잠깐의 멍 때리는 시간조차도 음악을 틀고 멜로디에 나를 맡기곤 했다.

내가 나를 느끼는 그런 시간이란 일기를 쓰는 시간이겠지만

일기를 쓰는 법도 일상의 기록으로

끝날뿐이었다.  잠들기 전 잠깐 하루를 정리하는 생각들을 하지만 그마저도

그 어떤 공상으로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잠들곤 할 뿐 나와의 대화는 아니었다.

도대체 나와 대화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그것은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글을 쓰면서 자신을 꺼내 볼 때  첫걸음마를 뗄 수 있을 것이다.


일기는 그만큼 자신을 마주하는 첫 번째 만남이다.

하지만 일기를 열심히 쓴다고 해서

자신과의 대화가 가능해지지는 않는다.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쓰고,  한점 거짓이 없이 쓴다고

자신과의 대화가 원활해지는 것 또한 아니다.

일기가

좀 더 깊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기 객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감정과 상황들을 기록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자기 성찰이 되어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자기 객관화가 가능해진다.

자기 객관화가 자유로워지면 그다음부터는

아주 조금씩 자신과의 대화에 물꼬가 트이기 시작한다.


내가 나이지만 내가 아니고, 분리된 나로 느껴지는 이런 느낌.

또한 아무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내가 느껴지는 이런 느낌

그래서 나라는 운명공동체들의 실체가 든든해져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마치 누군가와 함께 있고, 재미있어지는 이런 느낌

혼자가 아닌 느낌,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살아있어 우주의 별들조차

나와 연결되는 느낌. 이런 느낌 속에서 생각들이

조금은 다르게 재편되는 그런 느낌을 안고서 에고들에게 말을 건넨다.


지나간 과거는 기억이다. 기억은 자아들의 기록이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기억은 지나간 자아들의 감정이다. 자아들은 언제나

감정으로 나에게 대화를 건넨다. 지나간 사건사고들도 모두 감정들이다.


 사건사고들 속 내 자아들의 감정들이다.

그 감정들이  생각 .망상들을 덕지덕지 붙여서

오만가지 잡생각 들을 만들어내고, 일상 속에서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진다.

나와의 대화는 이런 오만가지 쓸데없는 생각들이 지나가는 자리에

나라는 정확한 정체성이 들어온다.


생각들의 지나가는 자리에 분명히 인식하는 대화들이

마치 글을 쓰듯이 오고 간다. 과거의 자아들은 감정과 함께 자신을

표현하기 때문에... 내가 혼자 중얼거리고 있을 때 무수한 감정의 느낌을 달고

자아들이 자신들의 빛깔을 드러낸다.

인간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쾌락을 느낀다.

세상에는 이야기하는 자와 이야기하기를 기다리는 자 이 둘로 나뉜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사람들이 주목해 주기 때문에 사람 들로부터 관심받고 있다는 사실에

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사람들로부터의 관심에서 얻는 쾌락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에서 멀어지게 한다. 혼자 있는 시간을 외롭게 한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까?


먼저 자기 자신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아가게 된다.

자신을 사랑하게 되면 타인들을 사랑하는 법도

자연스레 알게 된다.

나를 표현하는 방법이 조금씩 다양해진다.

 나라는 사람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 지적인 욕구가 늘어나고,

하나씩  지식이 쌓이는 만큼 그 지식이 무엇을 위한 지식인지를

사고하게 된다.

밥벌이를 위한 지식은 지루하지만 이 지식이 설렘을 준다면

단순한 이론적인 지식이라도, 몰입감으로 나에게 최고의 시간을 선물한다.

몰입은 사유 없는 나와의 또 다른 만남이다.  몰입의 최고 기술을

사랑이다. 사랑할 수 있는 자 만이 몰입이 가능하다.

하지만 몰입은 때로 균형감각을 잃으면 자폐가 될 수 있다.

주변을 인지하지 않는 몰입은 타인을 힘들게 할 수 있다.

나와의 대화는 언제나 스스로를  인지하는 내가 있다.

매일매일 매 순간 매초 느끼는 나라는 존재는 감정의 느낌이다.


과거의 자아들의 기억이 만들어낸 감정으로 우리는 사고를 한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는 이런 감정들에 대한 대화이다.  신체적 욕구들이 만들어낸

나의 수많은 원초적인 욕구들이 사회 속에서 다양한 사회적인 옷을 입고,

나의 근원적인 욕구가 아닌 사회적 욕구를 만들고,

그 사회적 욕구속에서 만들어진 감정들이 내 90의 자아들을 만들어 낸다.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만들어졌던 기억 속 자아들과

나를 인지하면서 만들어가고 있는 현재의 자아들과의 대화는

어쩌면  내가 아닌 내 안의 타인인지 모른다.

그런 타인들과 지금의 내가 하는 대화는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습관이란 패턴을 아직도 과거의 자아들이 장악하고 있으니

나는 늘 과거의 그 모습 그대로 반복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오늘도 그 과거의 자아들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이제 그만 쉬어도 된다고, 고맙다고, 이제는

지금의 내가 있으니 안심하고, 있어도 된다고,

앞으로의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들은

지금의 내가 다 안고 갈 테니..... 또 새롭게 인식하고,  나의 것으로 채워갈 테니

이제 그만 자유로워져서, 힘들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가 과거의 자아들과 행복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새로운 자아들이 더 많이

생겨나서 그 자아들과 더 많은 대화를 시도하고, 이해하고,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더 많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과거의 나에게 늘 휘둘리면서 살고 있지만  지금의 내가 언제나

과거의 나를 긍정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려면

지금 내가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그 존재감을 언제나 느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와의 대화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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