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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Sep 21. 2024

몸이 힘들면 잠수 타고 싶다.

고통

몸이 힘들면 매일 만나야 하는 사람들을 빼고는

타인들에는  잠수를 타곤 한다.  


몇 날 며칠이 될지 모르지만, 사람들과 멀어져 혼자로 돌아간다.

매일 부딪히는 친한 사람에게는 조용한 미소만 짓는다.

최대한 조용히 가볍게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하는 친구가

사무실 안에도 한 명쯤은 있으니,  그 친구에게는 무슨 말이 든 해도

편하지만, 최대한 나의 상태에 잠식되지 않게 노력하곤 한다.


몸이 힘들 때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증발하고 싶다.

아니면 그저 여행을 떠나 지친 몸을 더욱 지치게 하고 싶다.

하지만 늘 이런 것만도 아니다.

힘들 때면 반대로 더 더 업되어 아무렇지 않은 듯이 행동하기도 한다.

그 무엇을 선택하든, 달라지는 건 없다.


몸은 어느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금방 회복된다.

결국 그렇게 되어 있지만, 힘듬을 괴롭게 견딜 수밖에 없다.

힘듬을  흥미진진하게 받아들이는 건 언제나 어렵다.

몸에게 다가온 시련을 그저 당해내기에 급급하다.


만약 이런 고통이 신이 나에게 준 하나의 미션이라면 어떨까?

고통을 당한 것도 아니고, 찾아온 것도 아니고,

신이 어느 날 문득 던진 미션 수행장 같은 것이라면 어떨까!


만약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지독한 사고를 당했는데... 하늘에서 뿅 하고, 선물꾸러미가 떨어진다.

그 선물꾸러미를 펼쳤는데..

이렇게 쓰여 있다.  


먼저 나는 너에게 행복을 선물로 보내지는 않는다. 행복은 선물이 아니라

그저, 시험일뿐이다. 너희는 행복에서는 아무것도 얻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의 욕심과 안위만을 바랄 뿐이지.


그래서 선물이라는 의미를 한번 되새겨 보기를 바란다.

나는 오늘 네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움푹 페인 도로에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자전거 쇠덩이가 너의 가슴을 관통하는 그런

큰 사고를  선물로 보냈다.

  

이 불행은 네가 만든 것이기도 하고, 내가 만들어 너에게 심어 준 것이기도 하다.

한번 고통이 주어진 이상, 네가  그 원인과 이유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병원에 가서 약을 먹고, 원인과 이유에 대해 진지한 치료를 하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 그것이 이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고통을 견디어내면서 네가 너 스스로에게 하는 많은 이야기와

진짜 너의 모습이 나에게 보이기를 원한다.

내가 너희들을 만든 이유는 너희 각자 하나하나의 고유성과 소통하고 싶어서인데

너희는 하나의 거대한 우상( 국가, 공동체, 종교단체, 소유화된 사랑)을 만들어서

더 이상 나와의 소통을 단절시켜 버렸다.


사실 나도 신이지만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너희의 모든 걸 다 바꿀 수도 있고, 기적도 행할 수 있지만,

내가 만든 자연 안에서 순응하며 살다가, 내와 영혼으로 만나기를 원한다.

그래서 난 너희를 우상에서 벗어나 혼자가 되는 법을 선물한다.

가끔 사건, 사고, 질병, 등을 통해서 말이다.  너희는 이때 너희 스스로 혼자가 되어

그때서야 나와 소통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인간들도 종종 있다.

이것은 그저 너희의 선택일 뿐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네가 이 선물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끝은 아무도 모르며, 너는 평생을  우울과 불안 속  전쟁을 치르면서 살게 될 것이다.

이 고통의 유효기간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끝은 언젠가는 있다.  그 끝이 죽음이 될 수도 있고,

일주일이 될 수도 있고, 내일이 될 수도 있다.  나와의 강제적인 소통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연이 될 수도 있고, 사랑이 될 수도 있고, 하나의 깨달음이 될 수도 있다.

나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며, 그 무엇으로도 존재하니까 말이다.


단 한 가지 내가 이 고통을 선물이라고 하고 미션이라고 얘기한 데는 이유가 있다.

너희는 고통의 시간과 평온의 시간이 하나의 같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하나의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같은 것이라는 믿음을 깨달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뜻이다. 그 분별없음을 알고 나면 나를 선명하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고통을 하나의 창조의 결과물로 만든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준 선물을

가장 잘 해석하는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너희가 감사에 머물지 않고, 선물을 창조해 내는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

이 글을 읽고 나면,  고통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가

조금은 선명해 지리라고 여겨진다.


너는 고통 안에서 잠수를 타든, 일상을 아무 일 없이 보내든 그 무엇도 상관없다.

단지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너의 변화를 나와 소통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의 뜻을 깨닫기를 바란다.

나는 너희가 나를 경배해서 매주 예배를 드리고, 울고 불며 기도하고,

돈을 바치고, 죄를 사하여 주심시요, 하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면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다.  너희는 정말 어떻게 해야 나를 제대로 알 수 있을지...

지구의 반이 그렇게 살고 있으니... 하지만 그렇게라도 나를 알려는 노력은

인정해 주고 싶다.  최소한 나를 잊지 않고 살아가려는 노력은 하고 있으니...

이렇게라도, 너희 세상이 유지된다면,  말이다. 그리고 나의 뜻을

찾기를 바라면 말이다.


근데 너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너희는 나에게 무조건 감사하는 마음만

가지면 된다고 착각하는데.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 감사의 마음에 따른 다른 새로운 결과물을 나는 원한다.

너희가 감사 안에 들어있는 새로운 그런 마음을 나는 원한다.

내 말이 어려울 수 있겠지만  운명이라는 이름의 받아들임 속에서 잘 깨닫기를 바란다.


신이 지금 나에게 보낸 나만의 나의 선물꾸러미를 상상해 본다.


이렇게 쓰여 있다.

너는 참 성가신 아이 같다.  매번 나의 선물을 가장 잘 해석하고, 깨달으면서도,

매번 행복한 나날을 보내면서 다 까먹고, 또 두 눈을 굴리면서 두려움에 떨면서 선물은 던져 달라고

조르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넌 언제나 내가 기대하는 그 이상을 나에게

다시 선물로 돌려준다.  네가 느끼는 그 마음이 나에게 전달될 즈음엔 흐뭇하기도 하다.


 그래서 가끔은

큰 사고를 한번 더 크게 너에게 보내서 너의 능력을 한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곤 한다.

하지만 넌 또 얼마나 나를 원망하고, 삿대질을 해댈지 성가실 뿐이다.

네가 하도 나에게 말을 많이 걸어대니까 어쩔 땐 귀가 아플 때도 있다.


그래서 너에게는 선물을 보내고 싶지 않기 조차 하다. 하지만 너는 자잘한 나의

선물을 받고 싶어 하는 하는 것 같아서, 너에게 네가 감당할 만큼의 고통만 주곤 하는데...

요즘은 너의 마음이 스스로 그 고통을 만들어 나에게 말을 걸어오곤 하는구나.

너의 모래시계는 네가 바라는 대로 길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현명한 어린 아이다. 고통이 행복이라는 걸 아는 몇 안 되는 인간이지...

너의 그 고통이 사람들에게 평온으로 가 닿고 새로운 창작으로 거듭되기를 바란다.



 가끔은 이 선물꾸러미를 던져 버리고,  답장도 쓴다.


저는 아직도 두렵고 무섭습니다.  습관과 무의식이 언제나 나를 지배하는 시간을 살고 있고,

트라우마에 잠식당한 시간의 기억은 저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그냥 제 기억을 삭제해 주시면 안 될까요,  신은 참 멍청하십니다. 도대체 이런 왜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인간을 만드신 건지...

제가 힘든 시간 누군가가 아파 할 수 있기에

진짜 고통을 즐기는 온전한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나의 고통이 행복처럼 그렇게 지나쳐 가도록이요.

그래서 고통이 자유처럼 보이기를 요.

죽을 때까지 반복대는 이 게임을 보는 거 지겹지도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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