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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Oct 18. 2024

찬란한 소멸

스토리 텔링

잡다한 꿈을 많이 꾼 아침은 어김없이 잠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일어나도 개운하지가 않고, 여전히 잠 속에 빠져 있는 것만 같다.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지만 기억나지 않는 꿈을 붙잡고 있을 때도 있다.

깊은 잠을 잔 것인지


즐거움과 괴로움이 공존했던 간밤의 스토리에 빠져서 환타지속에서 헤매었던 건지

구분이 안 갈 때도 있다. 하지만 분명 꿈속에서 나는 행복했었고,

그 감정이 깊이 남아있어, 도대체 어떤 스토리였기에 이렇게 행복한 여운이

남아 있는지 기억해 내려고, 애를 쓰지만 스토리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스토리가 없지만 감정만 선명하게 남아있는 꿈.  꿈은 무의식 속의 환영 같은 세상인 건가!

재미있는 영화를 입체적으로 보고 느낀듯한 시간을 경험했던 무의식 속의

꿈은 그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스스로를 경험하게 한다.

도대체 이런 스토리들은 어디에서 만들어졌기에 잠 속에서 조차 나는 재미를 느끼고

깨어나기 싫어서 잠 속에 계속 머물고 싶은 걸까?

현실이 아닌 허구 속에서 보내는 시간은 일상에서도 많은 시간을 차지한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시간이 평균 하루에 두 시간 남짓 할 테고, 휴일에

어쩌다 시작한 ott드라마를 정주행 한 날이면 하루에 여섯 시간은 기본이다.

인간은 허구 속에서 자신의 간접경험을 통한 욕망을 충족하는데 퀘감을 얻는다.

이 퀘감은 도파민을 분비시켜서 장시간 우리의 뇌를 집중하게 한다.


삶은 어쩌면 모든 것이 스토리일지 모른다.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며

실제로 무슨 일들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일어나고 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관계 속에서 새로운 갈등과 감동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곤 한다.  예기치 못한 일로 인해 신뢰하고 믿었던  오래된 관계가

하루아침에 균열이 가기도 하고, 운명처럼 나와 너무나 잘 통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서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고, 평생의 동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과 영혼이 맑아지는 그런 대화 속에도 서로를 어루만져주는

그런 스토리 텔링이 있다.

시답지 않은 그런 말 따먹기 시시껄렁한 얘기 속에도 서로의 감정을 담은

소소한 스토리들이 깨알처럼 숨겨져 있다.

서로를 좋아하고 신뢰하면 스토리는 하나의 날개를 달고, 감정들을 서로에게 실어 나른다.

눈빛만 보고 있어도 좋은데, 언어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눈빛을 보면서, 침묵 속에서 생각이 만들어 내는 스토리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생각은 때로는 스토리를 지어내기도 한다.  평온하고 행복할 때는 상상의 나래를 펴고

즐거운 스토리를 만들지만 힘들고 불안하면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칼을 꽂고 있는 줄은

알면서도 부정적인 스토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과거의 기억이 끊임없이 떠다니고,

그런 기억의 파편과 지금의 스토리가 만나서 생각이라는 스토리가 탄생한다.


기억만으로는 그 어떤 감정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 기억 속에 그 어떤 판단과 분별이라는 인식이 덧붙혀져서 스토리가 첨가된다.

과거의 나쁜 기억이 떠오르면 그때 스토리가 쓰인다.


" 아 이 기억은 나를 힘들게 할 거야. 분명 또 심장이 요동칠 거야. 분명 슬픔이 휘몰아칠 거야"

이런 분별도 하나의 스토리다.


" 아 그날의 비참했던 기억이 떠오르는군, 그날은 내가 참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바보였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나지,  지금의 나는 이런 경험 속에서 그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는 않지

하지만 그때의 상처받은 내가 있기에 지금 나는 다른 인식을 하고,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거야.

그때의 불안하고, 서툰 내가 있기 때문에 그런 나에게서 배우고 지금 한층 성숙해져가고 있는

그런 지금의 내가 있는 거야 , 고마워 나의 기억들. 고마워 과거의 나"


이런 스토리를 쓸 수도 있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다른 해석으로 우리는 스토리텔링을 한다.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는 서로의 스토리로 시작되고,

각자의 스토리텔링으로 관계가 이어져 간다.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또 아무도 모른다.

내 인생도 아무도 모르고 이 세계가 어떻게 될지도 아무도 모르면서

이 불확실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거대한 스토리들이 마치 역사의 수레바퀴처럼 굴러가고,

한 개인은 그 역사 속에서 자신의 삶을 끼워 맞추면서,

역사에 휘말리기도 하고, 역사와 상관없이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온세계가 전쟁에 휩쓸려도 산속에 고립돼서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자신만의 스토리로 평온하게 일생을 살다가 혼자  죽는

그런  사람도 있다.

또한 자기 의지로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신경 쓰지 않고,  그 누구의 간섭도 신경쓰지 않으며 자신만의 스토리 텔링 속에서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 외부에서 일어나는 스토리와 그 스토리에 지배받지 않고, 나의 스토리에 집중해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외부의 자극에 흔들려서 언제나 유리처럼 부서져서 스스로의 삶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고,

외부의 자극을 이용해서 기회를 잡아 온갖 악행을 일삼으며 사는 사람도 있고,

외부의 자극과 싸우면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혁명을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스토리를 가지고 살고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 본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 답은 아주 간단하다.


지금 당장 나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며 모두를 위하고, 나를 위한 스토리를 쓸 수 있다.

그리고 그 스토리 안에서 행동할 수 있다.

또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상의 모든 일들을 나의 스토리로 재 해석 할 수 있다.

실제의 일뿐 아니라, 새로운 스토리 텔링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도 있고,

허구의 세계를 창조해 낼 수도 있다.


가장 불행한 삶은 바로 현실이라는 틀에 갇혀 삶의 신비를 모르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쫓으며, 쾌락과 고통을 오가는 사람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너머의 세계를 꿈꾸지 않는 사람은

빈약한 스토리텔링 속에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만 산다.


자신의 이야기가 없는 사람은  왜 태어났는지

왜 죽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소멸할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자신의 스토리 속에서 살다가 가는 사람은

찬란한 소멸 속에서 네버엔딩 스토리를 쓸 것이다.


나는 마지막 순간을 고비사막 한가운데서

죽고 싶다.  사막의 뜨거운 태양과 바람  그리고 모래 속에서  쓰러져 죽는 것이  하나의 바람이다.

하지만   그때는 걸을 힘도 없고 기력도 없을 텐데  어떻게 고비사막을 갈 수 있을까?

누가 나를 그곳으로

데려다줄 사람이 있을까?

그것이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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