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교
아일랜드내전이 한참이던 1923년 아일랜드의 작은 외딴섬. 이니셰린.
사건사고도 별로 없는 이 마을에 모든 사람들이 절친으로 인정하는 두남자에게 갑작스런 변화가 찾아온다.
다정하고, 긍정적인 파우릭은 40대중반으로 보인다.
배려심깊고 다정한 여동생과 같이 살면서, 외로움이 뭔지도 모르고 작은 것들에게 서 만족하면서 소확행을 즐기며
섬안에서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남자다. 섬안에서 즐길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가축들을 키우고 시간이 나면 수다를 떠는 것이 향유하는 시간의 전부이다.
그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일과가 끝난 2시에 늘 언제나
콜름과 함께 동네 유일한 술집에서 몇 시간 술을 즐기며 수다를 떠는 것이다.
하지만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육십 중반에 들어 선 절친 콜름이 늙음에 대한 기로에서 삶의 허무를 느끼고, 우울증이 심해지며
절친 파우릭에게 절교를 선언한다.
이유는 단 하나, 파우릭과의 지루한 수다를 떠는 일상을 더는 하고 싶지 않다는 것,
그리고 파우릭이 싫어졌다는 이유였다.
마을 사람모두가 콜름이 " 왜" 라는 질문을 파우릭에게 던진다.
파우릭은 계속해서 "모른다"라는 말로 일관한다.
콜름이 절교의 이유로 말한
지루함과 싫어짐을 파우릭은 그 어떤 의미로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단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라는 질문만을 자신과 타인들에게 던질 뿐이다.
너무나 다른 두사람은 애초부터 친구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바이올린 연주와 작곡을 하며 사회로 부터 도피해 온듯한 콜름에게
파우릭은 일상의 되풀이 되는 중독같은 존재였고,
마을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클름은
파우릭에게 새로움과 안정감을 유지해주는 존재 였다.
콜름은 이제 이런 지긋지긋한 중독을 끊어내고 뭔가 창의적인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독을 한방에 끊어내기 위한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 시작한다.
이런 콜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파우릭은
어떻게든 관계를 예전으로 돌리기 위해 그의 주변을 맴돌고, 설득하지만 ,
콜름은 제발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둬 달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침묵해 주기를 부탁한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과는
웃고 떠들며 잘 지내고 있는 콜름을 보면서, 파우릭은 괴롭고,
괴로운 파우릭을 보는 콜름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이런 콜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파우릭은 더욱더 콜름에게 집착한다.
한 번만 더 나에게 말을 걸면, 내 손가락하나를 자르겠다는 콜름의 선전포고를
듣고서도 파우릭은 침묵하지 않는다.
결국, 콜름은 자신의 손가락하나를 잘라 파우릭에게 던지면서
다시 한번 더 말을 시키고, 내 부탁을 무시하면 이번에는 나머지
손가락 네 개를 다 잘라버리겠다고, 선언한다.
여기까지 영화를 보다가 많은 이야기들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과연 나라면 어땠을까? 나는 콜름에 가까울까? 파우릭에 가까울까?
과거의 나라면 파우릭에게 더 감정이 이입 됐지만 지금의 나는
콜름에게 더 가까운 인물이다.
관계에 대한 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았지만 이렇게 극단적이면서
은유 가득한 스토리는 처음 보았기 때문에 쉬운스토리와
심플한 이야기지만 스릴러 못지않게 심장이 쫄깃거리면서
몰임감이 있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한 번쯤은 자신에게 집착하는 누군가에게 절교를 선언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도대체 싫다는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히는 거야
라고 하면서..... 상대방이 상처받는 걸 알면서도, 모진 말로 상대를
끊어내어 버리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관계는 돌고 돈다. 어느 날은 아무런 문제가 없던 관계에
별일도 아닌 실수로 절친으로부터 절교 선언을 당하기도 한다.
사과하고, 설득하면 회복될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 때문에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화해를 시도하지만 더욱더 벌어지고야 마는
관계가 되고, 집착은 미움과 증오로 바뀌는 결말을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을 것이다.
관계에 있어서 찾아오는 권태를 해결하는 방법은 절교라는 극단적 선언말고
서서히 멀어지기라는 다정한 방법도 있지만
콜름은 자신에게 솔직하고, 냉정한 사람이다. 타인을 향한 연민은 있지만
공감력은 없고, 자기자신에게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반면 파우릭은 타인들에게 다정하지만, 타인들을 이해하고, 그사람의 맥락을
읽어내며 사유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이 없고,
시간을 함께하며 대화를 나누는 그 순간을 즐긴다. 내가 다정하면 모든 관계는
문제가 없고, 다정함만이 관계를 지키는 힘이라고 믿는다.
이런 다정함이 쿨름에게는 지루함이고, 구속이고, 절망이며 하찮음이다.
섬사람들은 아일랜드의 미래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일상이 중요하다.
한 인간에게 찾아온 변화만큼이나 자신에게 다가올 변화를 두려워 한다.
오래 된 친구에게서 지겨움이 밀려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즐거움이 사라진 대화에서 나는 정체되고 있는 나를 한번쯤은 만난다.
찰떡같이 죽이 잘 맞던 관계도 권태가 찾아온다. 사유의 시간도 없고, 가슴이 뜨거워지지도 않고, 감동도 없고, 내면의 영적성장없이 시간만 죽이는 시간을 보내는것 같을 때는
거리두기를 하면서 관계를 쉬어가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내가 원하는 대화를 유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타인은 내가 아니다.
나와 사고 체계가 다르다. 비판의식도 다르고, 일상의 스몰토크도 다르고,
세상을 보는 눈도 다르다. 그런친구를 나에게 맍추려고, 하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존재하기를
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실망과 절망을 느낀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그 어떤 정체성에 집착하면서 스스로를 고집했다.
나는 이런것을 좋아하고, 이런것에 반응하는 사람이야 뭐 그런 스스로에 대한
고정관념,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때는 그런 나의 틀을 던져버려야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즐기고 함께 시간을 향유 할 수 있다.
함께 보내는 시간속에 서로의 존재를 투명하게 이야기하는 방법도
포함되어 있다. 어쩌면
나는 콜름이기도 하고, 파우릭 이기도 하다.
콜름의 단호함과 파우릭의 다정함 사이를 오고 가면서, 냉정하고, 지질하고,
못나고, 매몰차고, 불쌍하고, 독했던 모습들이 튀어나온다.
절교를 당하고,죽을 만큼 힘들어서 불면의 밤을 보내기도 하고,
어찌하지 못하는 날들은 왜 어째서라는 말들을
되씹기도 했다. 관계란 계약이 아니다.
자유의지일뿐이다. 좋아할 권리도 있고, 싫어할 권리도
동시에 있다. 배신할 권리도 있고, 의리를 지킬 권리도 있다.
하지만
영원히 변치 않는 우정, 사랑. 그런 것을 어릴 때는
그 말도 안 되는 믿음을 숭배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 당신은 변덕이 죽 끓는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타자들에게서 들으면서, 나는 나를 안도하게 되었다.
이제야 내가 조금은 변하고 있구나.
그 지긋지긋한 영원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관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오는 사람 안 말리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
나는 다정하지도 단호하지도 않은 그냥 무심한 그런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절교라는 단어를 들으면 스산한 바람이 지나가듯
오래된 신경통처럼 과거의 자아들이
울먹이기 시작하면서 아프다.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면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다 알아 주는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절교라는 망령들이 달려든다.
관계를 시작도 하기 전에 여기저기 마음이 쑤셔온다.
다정함이 병이었던 내 슬픈 자아가 영화 속으로 들어가,
이니셰린의 다정한 남자 파우릭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건낸다.
바이올린 연주자가 손가락을 자를 만큼 너와의 함께하는
시간이 지루하다고 하는 건, 니탓이 아니야.
자신 안에 영혼이 방전되어 너와 함께 보낼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은 거야.
너의 그 자잘한 즐거움이 부담스러운 거야. 너의 다정함을 볼 때마다
자신의 내면이 붕괴되고 있는 좌절감을 맛보는 거야.
콜름은 그런 사람이야. 너를 거부한다고, 너를 무시한다고,
너를 상처 준다고, 분노하지 말고, 콜름이라는 사람을
깊이 들여다 보길 바래.... 그를 존중해 주길 바래.
그를 그만 자유롭게 해 주길 바래.
그래야지만 너도 너의 시간을 찾을 수 있고.
고독이라는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자신이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