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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play Sep 26. 2024

낭만 20 ξ 짧은 글

<재개발 구역>


집으로 가는 지름길 중에 재개발 구역으로 철거를 앞둔 곳이 있다. 양쪽으로 철근을 세우고 가림막을 쳐서 도로와 인도의 경계가 아슬아슬하다. 위험해 보이지만 통행을 금지한 것은 아니다. 그 좁은 길을 지나면 곧 넓은 인도가 나타나기도 하고, 그곳을 지나야 만 도착하는 집도 있기 때문이다. 


가끔 크고 높은 시내버스가 지나가면 운전자 시야에 내가 안보일까 봐 만세라도 하고 싶지만, 그럴 리 없으니 뒤꿈치만 살짝 든다. 땅에 그어진 노란색 경계선을 넘어가지 않게 주의한다. 바닥을 보며 조심히 움직인다. 그렇게 걷다 보면 모두가 떠난 줄 알았던 곳에 여전히 있는 것들이 보인다. 초록풀, 민들레, 전봇대, 작은 곤충들.


그때 후둑후둑, 날갯짓 소리가 난다. 고개를 드니 가림막이 바람에 펄럭인다. 오르지 못하는 새들이 날아오른다. 시간에 갇힌 가게와 집들이 격자무늬로 엮인 쇠파이프에 한번 더 갇혀있다.

키 작은 정류소 표지판을 몇 개 지나 집으로 간다. 많은 골목과 도로와 정거장을 지나 

층계마다 크고 작은 화분이 놓인 어느 2층 집을 지나 집으로 간다. 


<시간 코드>  

   

시간 코드가 맞는 사람이 있다. 같은 시간, 비슷한 길에서 자주 마주치다 보면 전혀 모르는 사람과도 내적 친밀감이 쌓인다. 우리의 공통점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남매를 키운다는 것.     


어느 날은 신호를 기다리다가 ‘이 정도로 마주치는데 인사 안 하는 게 더 어색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건넨 첫인사말은, “안녕하세요. 자주 봬서 인사드려요.”     


여전히 우리는 이름도, 연락처도 모르지만, 늘 비슷한 시간에 같은 길을 걸어간다.

그렇게 서로 아는 것이 없어도, 껍데기를 몰라도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다.          


<바람>  

   

1.

시원한 바람이 분다. 앞서 걷던 내가, 네게 가는 바람을 막을까 봐 옆으로 비켜선다. 돌아보니 너는 팔랑대는 나비를 쫓고 있다. 바람이 눈에 보인다면 나비가 아닐까. 팔랑팔랑.   

  

2.

양떼목장 언덕에 오르자 후텁지근한 바람이 분다. 

사방에 깔린 풀은 내리쬐는 햇빛을 받아 연한 초록빛이다. 

바람에 풀이 눕는다. 부드럽게 일렁이며 윤이 난다.

내가 자른 아이의 짧은 머리칼도 바람에 눕는다.

너도 부드럽고 윤이 나는 멋진 어른으로 자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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