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도 안 해도 되고
돈도 없어도 되고
울지 않아도 되고
헤어지지 않아도 되고
만나지 않아도 되고
편지도 안 써도 되고
메일도 안 보내도 되고
메일도 안 읽어도 되고
- 이랑, <환란의 세대>
2021년 가장 많이 들은 곡 1위는 이랑의 ‘환란의 세대’다. 2분 38초부터 이랑이 맑은 목소리로 외치는 후렴구를 듣고 있으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족쇄들 - 이를테면 읽지 않은 메일, 업무 전화,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주변 사람들의 말소리 - 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가슴이 갑갑할 때 이 노래를 들었다. 점점 이 곡을 자주 들었고, 언젠가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곡을 반복해서 들었다. 그즈음부터 어떤 질문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특별한 건 아니지만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떠올렸을 법한 질문들이었다.
나는 정말 이 회사에 필요한 사람인가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지는 않을까
나는 몇 년 후에도 이런 모습일까
이 질문들은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이내 고막을 터트리고 귓구멍으로 줄줄 나올 것만 같았다. 이것들은 내 머릿속에 어떤 압력을 가했고, 그 힘을 간신히 버티고 있는 건 자존감이었다. 안 그래도 물렁물렁하던 자존감은 그 힘을 버티다 못해 납작해졌다. 퇴사를 마음먹고 나자 이 질문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머리 안에 존재하는 압력은 어디로도 빠져나가지 못한 채 여전히 자존감을 짓누르고 있었다.
퇴사 기념 회식을 했다. 팀장님 두 분과 같은 팀 사람 몇 명이 참석했다. 처음 가보는 양대창 집에서 모둠 세트를 시켜 불판에 구웠다. 고기 두어 점을 먹었을 때 팀장님은 일 잘하던 애를 홀랑 데리고 가면 어떻게햐냐며 남편을 장난스레 타박했다. 내가 무슨 업무를 하는지도 모르실 줄 알았는데. 기분이 묘했다.
사람들이 담배 피우러 간 사이, 과장님이 할 얘기가 있다면서 입을 뗐다.
"우리가 일할 때 초심이 중요하다고 말은 많이 하는데 와닿지가 않잖아요? 다들 중요하다고만 하지. 근데 나물 씨를 보고 생각이 들었던 게, 나는 일을 할 때, 일의 리스트가 머릿속에 있고 그걸 언제까지 해야 하고 언제 누구한테 시키고 얼마나 걸릴지를 보통 계산해놓거든요. 어느 날 퇴근 시간이 다 됐는데, 두 시간이면 하겠다 싶은 일이 있어서 두 시간만 야근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나물 씨가 퇴근 시간에 그걸 해서 딱 주는 거야. 내가 준 일도 아니었단 말이야. 그래서 나는 너어어어어어무 놀랬고, 어, 너어어어무 놀랬어. 왜냐면 여태 그런 사람이 없었거든. 그 뒤로 ‘나도 이렇게 일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 거야. 그때 딱 초심이라는 게 생각나면서, 나는 어떻게 일하는지 돌아보게 됐었던 것 같아. 그 뒤로 팀장님이 일을 시키면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한번 더 생각하게 됐어. 그때 진짜 놀랬어. 나물 씨랑 같이 일하면서 배웠던 점이 바로 그거야. 그래서 나도 일하는 방식이 조금 바뀌었던 것 같아. 아니, 바뀌었지.”
술기운 때문인지 귀를 열어놓은 채 멍하니 테이블에 남은 반찬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내 이야기가 맞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이야기라는 걸 받아들이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진심 어린 칭찬 해주셔서 감사해요. 회사를 다니면서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봐요. 다른 사람에게 그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어요.'라고 말했어야 하는데 고개만 끄덕거리다 '과장님이 더 고생하셨는걸요.'라고만 얘기했다.
그날 자리를 파하던 중 예전에 같이 일했던 팀장님이 별거 아니라며 쇼핑백을 하나 쥐어주셨다. 집에 와서 열어보니 한지에 곱게 포장된 회색 목도리가 담겨있었다. 취향을 타지 않으면서도 먼 곳을 떠날 때 짐이 되지 않을 만한 걸 고민했을 팀장님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다음날 아침,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카톡창을 켰다. 평소 같았으면 감사하다는 말과 이모티콘 하나만 보내고 끝냈을 텐데 더 이상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전날 회식자리에서 진심이 담긴 말을 들은 이상 나도 누군가에게 진심을 말해야 했다. 감사하다는 말을 길게 쓰고 나서 잠시 고민하다 마지막에 한 문장을 더 적었다. 팀장님을 뵐 때마다 더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곤 했었다고.
퇴사할 때가 돼서야 알게 된다. 티 나지 않게 일한 서로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심 어린 칭찬 한 마디를 듣는 게, 마음속에만 있던 진심을 전하고 받는 게, 어쩌면 그걸로 충분할지도 모른다고. 그제야 자존감을 누르고 있던 압력은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
Photo by Jason Leung on Unsplash
※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얼른 회복하여 한 주 뒤(8/18)에 더 좋은 글로 돌아오겠습니다. 건강하고 무탈한 여름 보내시길 바랍니다.